생각의 편린들

우리는 왜 허경영에 열광하는가

새 날 2014. 12. 5. 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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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경영 씨가 자신의 페이스북에 차기 대선 공약 13가지를 내걸어 화제다.  현재 민주공화당 총재의 직함을 가진 정치인이자 본좌엔터테인먼트 소속 가수이기도 한 특이한 이력 덕분에 '허본좌'라 불리기도 하는 그는, 17대 대선 당시 박근혜 대통령과의 결혼설을 퍼트리다 명예훼손 및 허위 사실 유포 혐의로 고소 당해 1년 6개월 간의 옥고를 치르기도 했던 독특한 인물이다. 

 

ⓒ매일경제

 

그뿐만이 아니다.  이후 가수로 전향한 그다.  2009년 첫 디지털 싱글 'Call Me'를 발표하여 싸이월드 등 다수의 음악 차트에서 1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하며 또 다시 화제를 불러모은 바 있다.  대선을 기반으로 다져진 그의 인기는 일종의 사회적 현상을 낳으며 허경영 신드롬을 이끌기도 하였으나 독특하고 황당한 기행 및 허언은 많은 이들로 하여금 어이없는 웃음을 짓도록 하기에 충분했다. 

 

그런데 이번 공약은 다른 때와 달리 예사롭지 않게 다가온다.  대한민국의 현 시국이 너무도 혼탁해서 그럴까?  그가 내던지는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폐부 깊숙이 파고든다.  허언이라고 치부하기엔 제법 묵직한 느낌마저 든다.  우선 어떤 공약을 내걸었는지부터 먼저 살펴보자.

 

 1. 이명박 구속 (사랑의열매 1조원 기부 시 면책)

 2. 박근혜 부정 선거 수사 (결혼 승락 시 면책)

 3. 새누리당 해체 및 지도부 구속 (소록도 봉사 5년 시 집행유예)

 4. 유엔본부를 판문점으로 이전

 5. 만 65세 이상 노인들에게 건국수당 매월 70만원씩 지급 (어버이연합 제외)

 6. 결혼수당 남녀 각각 5000만원씩 지급 (재혼 시 2분의 1 지급, 삼혼 시 3분의 1 지급)

 7. 출산수당 출산할 때마다 3000만원씩 지급

 8. 국회의원 출마 자격 고시제 실시-국회의원 3분의 1로 감원

 9. 정당정치 해산하고 국회의원들이 무보수 명예직으로

10. 몽골과 국가 연합

11. 바이칼 호수 서울시 공급

12. 만주땅 국고 환수

13. 독도 간척사업으로 일본 근해 500m 앞까지 영토 확장

 

역시 그답다.  허언증 환자답게 이번에도 꽤나 기발하다(?).  그러나 다소 황당해 보이는 공약들이지만, 우린 이를 보며 묵었던 체증이 확 뚫리는 기분을 느낄 수가 있다.  왜일까? 

 

우선 비근한 예로 박근혜 대통령의 공약을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녀의 공약은 허경영 씨의 그것에 비해 현실 정치인답게 훨씬 실현 가능성이 높은 것들로 채워져 있었다.  더구나 그녀 스스로 신뢰와 원칙을 강조하고 나섰던 바람에 많은 유권자들이 혹하며 표를 몰아주었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결과는 어땠는가.  핵심공약들은 줄줄이 파기됐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허경영 씨처럼 국민들 속이라도 시원스레 뚫어 주었더라면 지금처럼 좌절하거나 헛웃음을 짓고 있지는 않을 테다. 

 

ⓒ팩트TV

 

이른바 사자방으로 압축된 이명박 정권의 삽질이 국가 재정을 파탄나게 만든 바람에 재정 상황이 열악하다며 앓는 소리를 하면서 신기하게도 현 정권은 이를 덮기에 급급하다.  그나마 한참 이슈화되던 찰나, 때마침 터진 십상시 국정 농단이란 어처구니없는 사건으로 인해 그마저 묻힐 기세다.  국정원 등 국가기관을 총동원한 선거 개입을 통해 박근혜 정권을 탄생시켜 준 끈끈한 관계 외에도 이전 정권과 현 정권 사이엔 '이명박근혜'를 매개로 한 교묘히 이어지는 무언가가 있음을 감지하기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닐 테다. 

 

십상시로 대변되는 국정 농단의 엄중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은 단순한 문건 유출로 사건을 희석시킨 채 검찰에 수사 가이드라인마저 친절히 설정해 주었다.  유체이탈 화법은 덤이다.  그녀는 자신을 향한 명예훼손이나 허위사실 유포가 걱정된다며 사이버 검열을 지시했던 장본인이다.  시계는 분명 21세기를 가리키건만, 우리 사회는 20세기로 돌아간 느낌이다.  



입으로는 국민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정작 국민 따위 안중에도 없는 정치권은 그저 당리당략에만 집중하는 모양새다.  여야가 따로 없다.  모두가 한 통속이다.  서민들의 삶은 갈수록 피폐해져 못살겠다고 아우성인데, 이를 보듬어주기는커녕 자신들의 잇속에만 눈이 멀어있다.  가장 만만한 서민 증세를 통해 가뜩이나 힘든 이들의 등골을 휘게 만들고 있다.  이른바 등골브레이커다.

 

18대 대선은 부정선거임이 명백하였으나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부여하고, 이의 부당성을 거론하던 목소리엔 점차 힘이 빠지더니 어느샌가 꼬리를 감추고 말았다.  세월호 국면에선 굳은 약속과는 달리 아무도 책임을 지지 않는 파렴치한 모습을 선보였다.  국민들의 좌절감과 상실감은 눈덩이처럼 커져만 간다.  여기에 경제 상황마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다.   

 

ⓒJTBC 방송화면 캡쳐

 

이런 상황에서도 야당은 야당의 구실을 제대로 못한 채 나약한 모습만을 내비치고 있으니 국민들의 탄식은 배가되고 있다.  수십조 원에 달하는 혈세를 삽질을 통해 강바닥 등에 마구 뿌려도, 부정선거를 통해 권력을 잡고 세월호 등 국가 재난 상황에 대해 아무도 책임을 지려 하지 않으며, 대통령과 관련한 허위사실을 유포한다며 국민들의 입에 재갈을 물려 와도, 십상시와 같은 환관 정치로 국정을 농단하고 막가파식 정책을 통해 국민들의 삶을 피곤하게 만들거나 담뱃값 인상 등 서민증세를 통해 서민 등골을 마음껏 뽑아도, 우린 아무 일도 없다는 듯 그저 숨 죽인 채 조용히 살기 바쁘다. 

 

이런 상황에서 비록 허언이라지만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사람이 등장하였으니 이 얼마나 반가운 노릇인가.  삽질로 국가 재정을 파탄나게 만든 장본인을 구속시킨다거나 부정선거에 대해 수사를 벌이고, 아울러 국회의원 등 정치권을 향해 내뱉는 쓰디 쓴 공약은 그야 말로 가뭄 뒤의 단비처럼 와닿는다.  깨알 같은 옵션에선 그의 놀라운 재치마저 엿보인다.  그중 '어버이연합 제외' 옵션은 그야말로 압권이다.  국민들의 마음을 속 시원히 대변하고 있다.

 

우린 허경영 씨를 흔히 허언증 환자라며 손가락질하고 있지만, 신뢰와 원칙이란 단어를 꾹꾹 눌러 쓰며 애써 강조했던 분 역시 만만찮다.  아니 오히려 그보다 더한 환자로 와닿는다.  허경영 씨는 현실 정치인들과는 달리 적어도 우리에게 웃음이라도 선사해주고 있지 않는가.  정치권이나 집권세력이 현재 우리에게 안기고 있는 좌절감과 무기력감에 비한다면 너무도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때문에 우린 그의 공약이 허황됐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에게 빠져들거나 공약에 열광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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