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편린들

부모의 양육 책임 한계는 과연 어디쯤일까?

새 날 2014. 3. 10. 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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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가출한 한 여고생이 자신의 부모를 상대로 학비와 생활비를 달라며 소송을 제기한, 무척 당황스러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다행히 국내가 아닌, 얼마전 동해병기 법안 추진에 동참 의사를 밝혀왔던 미국 뉴저지 주에서의 일입니다. 

 

부모의 양육 책임의 한계가 과연 어느 선까지인지, 법의 잣대에 의한 판단이라는 초유의 사태인지라 세간의 관심이 집중되었던 건 너무도 당연합니다만, 그보다는 정작 자식이 부모에게 소송까지 걸어야 하는 세태에 대해 미국인들은 그저 놀라움과 씁쓸함을 동시에 표현하고 있었습니다.

 

레이철 캐닝 ⓒ세계일보

 

레이철 캐닝이라 불리는 이 여고생은 법정에서 "부모가 고교 수업료와 대학교 등록금 지급을 거부했으며, 18세가 된 지난해 집에서 쫓아낸 뒤 생활비도 지급하지 않고 있다"고 주장했으나, 실상은 그녀 스스로 집을 나갔으며, 평소 귀가시간 엄수와 같은 집안 규율을 잘 지키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에 판사는 법정에서 다음과 같이 판시하며 부모의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당신이라면 이런 소송을 용납하겠는가?  이는 자식이 부모에게 버릇없이 굴다가 가출하고서는 뒤돌아서 '앞으로 매주 내게 돈을 보내라'고 요구하는 웃지 못할 상황 아닌가.  공공정책에 관한 문제인데 자칫 부적절한 선례가 될 수 있다.  따라서 부모는 딸의 고교 수업료를 내줄 필요가 없다. 

 

이번 판결은 비록 남의 나라 얘기지만, 자녀 교육에 관한 한 유독 극성스럽다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 큽니다.  그동안 자식 문제라면 기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제 몸 부서지는 줄 모른 채 가시고기 마냥 아낌없이 지원해왔던 대한민국의 부모들입니다.

 

그런데 결과는 어떻던가요?  그렇게 애지중지 키워온 자식들은 제 살 궁리에만 골몰한 채 바쁜 척만 하고 있고, 부모 봉양과 같은 전통 미덕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 결국 부모들은 그나마 남아있던 자산마저 자식이란 블랙홀에 모두 빨리며 늙은 육신만 남은 상태인데, 의료기술과 생활 환경은 갈수록 개선되어 수명은 늘어나고, 가진 자산이 없어 남은 여생은 축복이 아닌 재앙이 되기 일쑤입니다. 

 

ⓒ매일경제

 

구체적인 수치를 들여다보게 되면 우리의 녹록지 않은 현실이 더욱 뼈저리도록 와닿습니다.  최근 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자녀 1인당 한달 평균 양육비가 120만원으로서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대략 자녀 1인당 3억원 정도의 비용이 소요되는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2013년 기준으로 미국의 1인당 GDP가 5만 2,839달러에 달하고, 반면 우리는 2만 3,837달러에 불과한지라 미국이 우리보다 두 배 이상 잘 살고 있는 현실임에도 불구하고 그나마도 미국은 중산층 이상의 수준에서조차 자녀 양육비로 2억 7,000만원 정도만을 쓴다고 하니, 우리의 그것이 얼마나 과도한지 단적으로 비교가 된다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러한 현실은 여러 종류의 복합적인 사회 문제를 연쇄적으로 만들어내고 있었습니다.  자녀를 키우는데 너무 많은 비용이 소요되다 보니 가임 연령층에서 아이를 낳지 않으려 해, 우리 사회는 저출산의 늪에 깊이 빠져 허우적거리게 되고, 반면 평균수명은 갈수록 늘어 노년층의 인구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 성장의 탄력이 둔화되며 경제의 축을 움직이는 동력이 한없이 약해져 국가의 존망마저 우려해야 할 상황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이런 상태가 지속된다면 가까운 미래엔 젊은 세대들이 자신들보다 훨씬 많은 수의 노후 세대를 책임져야 하는 암울한 상황에 맞닥뜨리게 될지도 모를 일입니다.

 

예전에 비해 수명이 한껏 길어진 탓에 은퇴 후에도 수십년을 더 살아야 하는 노년의 삶은 만만치가 않습니다.  자녀들을 교육시키느라 부모들의 등골은 휘어질대로 휘어져 모두를 잃고 바짝 마른 노구만이 남게 된 탓입니다.  게다가 부모 봉양 문화조차 점차 옅어져 가는 상황에서 결국 노구를 책임질 수 있는 건 본인들 스스로밖에 없습니다. 

 

자식에 대한 무조건적인 사랑은 아마도 자식을 부모의 소유물인 양 인식하는 우리만의 독특한 의식과 문화적 소산에서 비롯된 경향이 짙습니다.  최근 잇따르고 있는 부모와 자식의 동반자살이 그의 단적인 사례입니다.  이러한 의식의 흐름은 21세기를 내달리는 현재에도 좀처럼 바뀔 줄을 모릅니다.  나아가 대부분의 부모들은 자식이 자신들의 아바타가 되길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부모의 삶과 자식의 그것은 엄연히 달라야 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자식과의 얽힌 기묘한 속박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게 현실입니다.



자식 뒷바라지에 목숨을 거는 연유는 아마도 이러한 뿌리깊은 문화로부터 비롯된 듯싶습니다.  다른 측면에서는 부모들이 자녀의 성공을 통해 자신의 삶을 보상 받고자 하는 심리가 강하게 작용하는 데다가 우리 교육의 지나친 과열 경쟁이 빚어낸 한 편의 희극과도 같은 양상임엔 틀림없습니다만, 이젠 부모 자신들의 현실적인 문제 해결을 위해서라도 이러한 패턴에서 벗어나야 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부모 봉양 문화가 점차 옅어지듯 자식에 대한 무조건적인 희생도 이젠 변화해야 할 시점인 것입니다.

 

기러기 아빠를 자처하며 엄청난 돈을 들여 자식 유학을 보내놓았더니 스스로가 잘나서 그런 줄 알고, 자신들을 애지중지 길러낸 노부모는 내팽개친 채 자기들끼리만 알콩달콩 산다는 사례, 숱하게 보아왔습니다.  귀하게 자란 자식일수록 부모 귀한 줄 모른다는 말은 결코 허튼 소리가 아닙니다.  지금과 같이 부모가 자녀에 대해 무조건적인, 아낌없는 나무가 되었다간 자칫 자신들의 노후가 불행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정부의 노후 복지 시스템이 취약한 상황에선 더더욱 위태롭기만 합니다.

 

자녀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예전과는 달리 부모들 또한 영악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교육비 지원에 있어서도 무조건적인 헌신과 지원이 아닌, 보다 합리적인 판단을 통해 가장 효율적인 방법을 취사 선택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극단적인 예를 들긴 했지만, 미국의 사례처럼 부모의 보호로부터 스스로 벗어나 가출하는, 부모를 곤란한 상황에 처하게 만들거나, 꼭 그렇진 않더라도 자식으로서의 의무를 다하지 않는 자식들에겐 그에 상응한 대접을 해주는 것도 때론 필요해 보입니다.

 

비단 노후의 고단한 삶에 대한 일종의 보험 성격이라는 측면에서나 혹은 국가의 장래에 대해 반드시 거창한 수준의 염려를 해야 한다는, 애국심에서 우러난 거대담론 따위 때문에 꺼내든 얘기가 결코 아닙니다.  부모라는 이름이 무슨 죄인이라도 되던가요?  대한민국의 부모들도 이젠 부모라는 이름 하나 때문에 자식에 대해 무조건적으로 희생하기만 하던 삶의 굴레에서 벗어나 자신들 본연의 삶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 의미에서 볼 때 부모가 자녀 양육비를 어느 선까지 지급해야 하는가에 대한 미국의 법적 판결이, 자식의 부모에 대한 소송이란 황당한 결과로 인해 씁쓸한 현 실태를 말해주고 있지만, 그보다는 우리의 합리적이지 못했던 양육 행태를 일깨우는 경고등이 되어주는 듯한 느낌이라 무척 반갑게 와닿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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