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접 경험의 즐거움

<그랑블루> 장엄한 대자연과 인간이 그려낸 서사시

새 날 2013. 7. 26. 0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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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려 25년 전의 영화가 다시 돌아왔다.  물론 국내 개봉은 1993년에 이뤄졌기에 그로부터는 20년이란 세월이 흐른 셈이다.  다시 개봉되는 이번 작품엔 "리마스터링 감독판"이란 부제가 붙었다.  그렇다면 1993년 국내 개봉작과 비교해 무엇이 달라진 걸까?  안타깝게도 20년 전 이 영화를 감상하지 못한 난 변화된 부분을 감지할 수 없었다.  다만 배급사의 홍보물에 떠도는 전언에 의지하여 굳이 읊어본다면, 삭제되었던 58분의 분량이 복원되었고, 아날로그 필름으로 찍었던 당시의 화면을 디지털화하여 HD화면으로 리마스터링한 것이란다. 

 

신기하다.  강산이 두 번 이상은 변했을 법한 시간의 흐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 왜 촌스럽거나 어색하게 와닿지 않는 것일까?  물론 그 이유로 뤽 베송 감독의 탁월한 연출력을 가장 먼저 꼽을 수 있겠지만, 그보다는 그때나 지금이나 크게 변함 없는 대자연과, 그 안에서 어우러지는 역시 변함 없는 인간의 우정, 사랑이란 소재를 담아냈기 때문 아닐까 하는 나름의 해석을 붙여 본다.

 

광활한 바다뿐 아니라 지구촌 곳곳의 웅장한 대자연을 스크린으로 가득 옮겨와 우리의 오염된 안구, 그리고 세상 시름에 꽉 막혀있던 마음까지 깨끗하게 정화시켜 주는 느낌의 영화다.  줄곧 흘러나오는 시원스런 배경음악은 화면과 찰떡궁합으로 어우러지며 몽환적인 분위기와 함께 보는 내내 청량감마저 느끼게 해주었다.  이런 느낌을 얻을 수 있는 또 다른 이유, 아마도 지리헸던 장마와 30도를 오르내리는 불볕더위란 계절적 요인도 한 몫 단단히 했으리라.

 

그리스, 프랑스, 이탈리아 그리고 페루와 안데스산 등 넓게 트인 파스텔 톤의 바다로부터 눈 덮인 뾰족 산봉우리까지, 카메라는 대자연을 좇아 쉼없이 움직인다.  168분에 달하는 긴 러닝타임동안 아마도 3분의2 이상을 바다 장면에 할애하지 않았나 싶을 정도로 집요하게 바다의 안팎을 그려내고 있다.

 

 

새하얀 담벼락과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전형적인 그리스의 조그만 항구, 이 아름다운 마을엔 자크와 엔조라는 아이가 살고 있다.  이들은 늘 바다를 끼고 생활해 온 터라 바다에 들어가 노는 일에 익숙하다.  그중에서 특히 엔조는 그 누구보다 경쟁 의식이 남 달라 바다에서 노는 일조차 라이벌인 자크를 의식하며 늘 그를 앞서기 위해 노력한다.

 

무거운 구형 잠수 장비를 입은 채 바닷속에서 해산물 채취로 돈벌이를 하는 아버지를 따라 평소와 다름 없이 배를 타고 어느날 바다에 나선 자크, 바닷속에서 열심히 작업하던 아버지를 한 순간의 사고에 의해 그만 차가운 바다 속으로 영원히 놓아버리고 만다. 



이후 약 20년의 세월이 흐른다.  성인이 된 엔조는 어릴적 한껏 뽐내왔던 잠수 실력을 살려 바다에서 난파된 이들을 구해주고 그로부터 얻은 대가를 통해 생계를 유지해 나가고 있으며, 자크는 이억만리 떨어진 남미 페루의 안데스산에서 역시 다이버로서의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어느날 뉴요커 보험사 직원 조안나(로잔나 아퀘트 분)가 업무차 자크가 머물고 있던 안데스산을 방문하게 되는데, 이때 단 한 차례 마주친 자크를 보고선 한 눈에 빠져들며 사랑이란 열병에 사로잡히게 된다.  한편, 현 잠수 세계챔피언인 엔조(장 르노 분)는 옛친구 자크(장 마크 분)에게 세계 잠수 대회 초대장을 보내고 두 사람은 잠수대회가 열리는 이탈리아에서 20년만에 만남을 갖게 된다.

 

자크를 향한 사랑에 흠뻑 도취된 조안나는 그를 만나기 위해 회사에 거짓 출장을 신청하고 자크가 머물고 있는 이탈리아로 향한다.  결국 잠수대회가 열리는 이탈리아에서 자크, 엔조, 조안나 이 세 사람은 극적인 만남을 갖게 되는데...

 

 

자크는 흡사 바다에서 온 생물이라 칭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바다에 들어갔을 때의 호흡 방식 또한 고래나 돌고래와 흡사하여 그 누구보다, 절친이자 잠수 세계 챔피언인 엔조보다 오랜 시간 깊은 잠수가 가능하다.  돌고래를 가족으로 생각할 정도로 함께 교감을 주고 받으며 친숙하게 지낸다.  심지어는 밤을 지새며 돌고래와 함께 물 속에서 놀다가 돌아오기도 한다.  때문에 그를 사랑하며 자신만 바라봐주었으면 하는 연인 조안나의 가슴을 후벼 파기도 한다.  자크와의 사랑에 있어 유일한 갈등 구조다.

 

 

자크가 돌고래를 잡고 바닷속을 유영하는 모습은 일반인들이 흉내내기엔 매우 어려운 고난도의 기술로 보여진다.  이 영화가 만들어진 시점이 1980년대라 CG기술이 지금에 비해 현저히 떨어질 터, 덕분에 모든 화면들은 직접 카메라를 들이대어 찍은 정성 가득한 실사들이란다.  이 영화만의 또 다른 매력이며, 20여 년이 흐른 뒤에도 여전히 살아있는 느낌에 재개봉이 가능한 이유일 듯싶다.

 

 

둘도 없는 어릴적부터의 친구 엔조와 자크, 엔조는 라이벌 의식이 매우 강한 성격이지만 그 만큼 자크에 대한 우정 또한 깊다.  허세 부리기를 좋아하고 다분히 호탕한 엔조에 반해 자크는 내성적인 데다 말수마저 적다.  둘의 우정이 오랜동안 유지되어 올 수 있었던 비결 중 하나일 듯싶다. 

 

 

자크의 연인 조안나는 사랑이란 열병에 빠져 과감한 도박을 감행한다.  그를 만나기 위한 일념 하나만으로 멀리 뉴욕으로부터 이탈리아까지 기꺼이 날아와 그와의 시간에 합류한다.  사랑의 발로 쯤으로 보이는 그녀만의 다소 무모한 행동들, 그저 귀엽기만 하다.  한 가지 안타까운 점이라면 바다와 혼연일체에 가까운 자크가 일반 사람들과는 다른, 워낙 독특한 성향의 인물인지라 이로 인해 겪는 가슴앓이가 꽤나 컸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그녀, 결국 그의 의지를 꺾지 못한 채 바다로 돌려 보낸다.

 

 

엔조는 생긴 외양 만큼 호방한 성격에 다소 엉뚱발랄하기까지 하다.  라이벌로서의 자크를 강하게 의식하고 있지만 반면 그 이상으로 자크를 끔찍하게 아끼며 챙긴다.  그들의 경쟁은 수 차례의 잠수대회에서 기록 갱신을 통해 이뤄지지만 자크의 초인적인 잠수능력을 엔조가 따라잡기엔 다소 버겁다.

 

 

사실 스토리는 매우 단순한 구조다.  특별한 감동을 선사해주거나 요새 영화들처럼 자극적인 소재를 갖추지도 못 하였고, 그렇다고 하여 이렇다 할 반전 요소조차도 없는, 처음부터 끝까지 잔잔함 일색이다.  때문에 3시간에 가까운 상영 시간이 다소 지루하게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스크린을 가득 메운 웅장한 대자연의 모습, 특히 생생한 바다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 설레게 하는 일임엔 틀림 없다.  25년 전의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촌스러움이 전혀 묻어나오질 않는다.  오히려 이 영화를 지금 다시 촬영한다면 실사보다는 CG에 의지할 것이 뻔하기에 아날로그적 감성으로 정성들여 촬영한 당시의 화면이 더욱 소중하게 느껴진다.  얼핏 생각해 보면 말초신경을 자극하거나 재밌는 소재거리로 반짝 인기를 끌기 위해 만들어진 흥행 위주의 영화라기보단 마치 예술 장르의 영화와 같다는 느낌마저 들 정도다.   

 

감독은 거대한 자연(바다)과 인간은 하나라는 메시지를 던져주려 했던 걸까.  돌고래를 가족이라 여기는 자크가 결국 돌고래와 함께 바다로 돌아갔듯 말이다. 

 

장마철도 끝나가고 본격 무더위가 시작되는 시점이다.  누구나 더위를 피해 바다로 뛰어들고픈 마음이 굴뚝 같을 텐데, 멀리 바다에까지 직접 갈 필요 없이 시원한 극장에 앉아 이 영화를 감상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바다를 다녀온 이상의 감흥을 맛볼 수 있을 듯싶다.  

 

시원한 여름을 위해 추천하고픈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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