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저냥

아메리카노와 한약

새 날 2019. 12. 23. 1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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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람들이 가장 즐겨 찾는다는 한 브랜드 커피전문점에 들렀다. 물론 개인적으로 간 건 아니다. 모임의 뒤풀이 장소라 어쩔 수 없이 가게 됐다. 입구에 들어서니 높다란 천장과 넓게 트인 매장의 전경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이러한 개방감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좁아터진 공간의 여느 커피숍과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좌석 곳곳에 노트북을 펼쳐놓은 채 무언가 작업에 몰두하는 손님들이 눈에 많이 띄었다. 그 가운데서도 넓은 공간에 비해 터무니없이 좁아 보이는 긴 협탁에 상대방의 노트북이 닿을 듯 말 듯 마주 앉은 젊은이들의 모습은 퍽 인상적이었다. 일행이 아닌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이 가까이 마주 앉는다면 난 답답해서 못 견딜 것 같은데, 정작 그곳에 앉아있는 이들은 전혀 개의치 않은 표정이었다. 이런 것도 요즘의 트렌드일까?


아무튼 우리 일행은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은 뒤 커피를 주문했다. 큰 사이즈의 아메리카노를 원했는데 막상 이를 받아 든 뒤 나는 이곳의 생경한 광경과 더불어 또 한 번 놀라야 했다. 머그잔이 워낙 커서다. 이렇게 큰 사이즈도 있었던가 싶을 정도로 내 앞에 놓인 잔은 부담 백배였다. 이를 무심코 바라보던 난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커피 한 모금을 들이켰다. 목 넘김을 하려는 순간, 불현듯 특정 이미지 하나가 머릿속에서 떠오른다. 다름 아닌 한약이었다. 광활한 크기의 컵에 담긴 씁쓸한 향과 시커먼 색상의 커피는 어릴 적 어머님이 내게 정성껏 다려주시던 바로 그 한약의 이미지를 연상케 했던 것이다. 



대개가 그럴 법하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는 한약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약효도 믿을 수 없었다. 양약처럼 당장의 효과를 기대하고 복용하는 약이 아니었던 까닭이기도 했고, 젊음에 대한 과신이기도 했다.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믿음이기도 했다. 코의 점막을 자극하는 한약 특유의 향과 목 넘김 때마다 식도로 스며드는 그 쓴 맛도 결코 내 취향이라고 볼 수는 없었다. 



얼마 전의 일이다. 어머니께서 아무런 맥락 없이 나더러 보약 한 재를 먹지 않겠느냐고 넌지시 말씀하신다. 예전 같았으면 나는 이런 제안이 달갑지 않아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을 테다. 아마도 “그런 걸 뭣하러 돈 주고 사 먹어요”라는 말을, 툭하고 내뱉지 않았을까 싶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나는 혹여 나중에라도 어머니가 변심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제안을 냉큼 받아들였다. 


어릴 적엔 보약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 한약 먹는 일을 꺼려했으나 이제 내 나이는 어느덧 중년을 훌쩍 넘어섰다. 무릇 건강을 생각해야 하는 나이이다. 이런 상황에서 공짜로 준다는 보약을 마다해야 할 이유는 없었다. 효험이 있든 없든 그건 차후의 문제였다. 오히려 이게 웬 떡인가 싶었다. 저 혼자 넝쿨째 굴러 들어온 복을 혹시라도 놓칠까봐 나는 잽싸게 낚아챘다. 그렇게 하여 어머니께서 건네주신 한약을 한 방울도 남김없이 모두 먹게 된다. 물론 이 약을 복용하였다고 하여 당장의 특별한 효험을 기대한 건 아니다. 앞서도 언급했듯 한약에 대한 나의 신뢰도는 완전한 바닥 수준이다. 그저 내 몸을 위해 저축한 셈 쳤을 뿐이다.  


하지만 의외의 일이 벌어졌다. 난 평소 구내염을 자주 앓아왔다. 조금이라도 신경을 쓰거나 스트레스 받는 일이 있으면 여지없이 구내염이 발병하곤 했다. 발생 부위도 다양했다. 혀와 잇몸 그리고 입 안쪽까지, 입과 관련한 부위라면 그 어떤 곳이 됐든 가리지 않고 골고루 발병했다. 조금 심하다 싶은 날엔 가능한 부위가 한꺼번에 아파오기도 했다. 이때의 고통은 상상을 초월한다. 



구내염이 자주 발병하다 보니 사실상 치료는 언감생심이었다. 병원에도 가보았으나 소용없었다. 대증적인 치료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상태가 결코 아니었다. 때문에 체질적인 특성이겠거니 생각하고 그동안 고통을 오롯이 감내해 왔다. 어릴 적부터 오늘날까지 해당 증상을 쭉 안고 살아왔는데, 신기하게도 이 한약을 먹은 뒤로는 그 고통이 깨끗이 사라진 것이다. 이후로 난 한약의 효험을 추호도 의심치 않는다. 마지 못 해 억지로 먹던 습성과 달리 자발적 의지가 반영된 약 복용이 약의 효능을 내 몸에 잘 스며들도록 조응했음이 틀림없다. 학습을 포함한 세상의 모든 일도 자발적 동기에 의한 결과물이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훨씬 더 탁월하듯이 말이다.


동그란 머그잔에 담긴 커피의 이미지는 사발에 담긴 한약을 연상케 한다. 단순히 외양 때문만은 아니다. 커피는 식도를 거쳐 위로 스며든 뒤 우리의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정서를 안정시켜준다. 한약은 또 어떤가. 목 넘김과 동시에 약효가 서서히 온몸으로 퍼지면서 허해진 신체를 보호해주거나 튼튼하게 만들어준다. 차이점이 있다면 커피는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반면, 한약은 신체에 축적되었다가 비교적 오랜 시간에 걸쳐 천천히 반응한다는 점일 테다. 내가 씁쓸한 커피를 마시며 한약을 떠올린 건 결코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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