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접 경험의 즐거움

우리 모두의 이야기 '82년생 김지영'

새 날 2019. 10. 29. 1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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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년생 김지영(정유미). 전업맘인 그녀에겐 언제나 살갑게 대해주는 남편 대현(공유)과 낳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사랑스러운 딸 하나가 있다. 아기를 키우는 그맘때 가정이라면 으레 그러하듯이 그녀 역시 가정을 돌보랴 아이 뒤치다꺼리하랴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이러한 형편 속에서도 변함없이 그녀를 지지해주고 성원해주는 남편이 있었기에 그녀는 그나마 어려움을 꿋꿋이 이겨낼 수 있었다.


그랬던 그녀가 언젠가부터 이상한 행동을 보이기 시작했다. 흡사 다른 사람이 그녀의 몸을 빌린 양 전혀 엉뚱한 사람이 되어 말을 내뱉곤 했다. 대현은 아내가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될 경우 더욱 곤란해질 것 같아 털어놓지 못하고, 당사자인 지영은 정작 그러한 사실을 전혀 모른 채 살얼음판 위를 걷듯 일상을 살아간다. 


영화 <82년생 김지영>은 조남주 작가의 동명 베스트셀러 소설을 원작으로 한 작품이다.  1982년에 태어난 평범한 여성 김지영이 오늘날 우리 사회를 살아가며 겪게 되는 이야기를 그렸다.



지영의 삶은 아기를 낳은 후 크게 달라진다. 우선 육아를 위해 멀쩡히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어야 했다. 당장 발등에 떨어진 불부터 꺼야 했기에 자아실현의 꿈은 잠시 뒤로 미뤄놓은 셈이다. 물론 이러한 결과가 한 여성을 경력단절이라는 헤어 나오기 쉽지 않은 늪으로 빠뜨릴 위험성이 매우 크다는 건 모두가 알 만한 사실이다. 독박육아는 그 자체로 고달픔의 연속이었으며, 더불어 아기 엄마를 향한 주변의 시선 또한 곱지 않은 현실이 지영을 끊임없이 괴롭힌다. 


그렇다면 워킹맘의 현실은 어떨까? 지영이 몸담았던 직장의 김팀장(박성연)은 모든 여직원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될 만큼 똑 부러지고 육아를 비롯한 가정도 잘 돌봐온 여성이었으나 결국 유리천장에 막혀 직장 내에서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독립하게 된다. 이처럼 영화 속 여성들은 그들에게 짐 지워진 상황을 꿋꿋이 극복해내고 일 또한 어느 누구 못지않게 잘 처리해내고 있었으나, 결국 여성이라는 이유 하나로 불이익을 당해야 하는 처지였다. 



뿐만 아니다. 여성에게 있어 세상은 온통 부조리와 위험투성이였다. 지영이 청소년기 통학버스 안에서 치한에게 성추행을 당할 뻔한 사건이 벌어지자 지영의 아버지는 대뜸 피해자인 지영의 옷매무새와 태도부터 질책한다. 당시는 딸자식이 사회에 진출하여 스스로의 영역을 개척하고 역량을 발휘하기보다 결혼하여 남편의 뒷바라지하는 것을 최고의 덕목으로 여기던 시대였다. 영화는 이를 남성 개개인의 문제라기보다 가부장제가 지배하던 경직된 사회 분위기 탓으로 책임을 돌린다. 


과거에 비해 여러모로 여성들에게 우호적인 환경이 조성되고 있기는 하나 여전히 남성 본위의 문화가 사회 저변에 깔려 있는 탓에 암암리에 압박해오는 불합리와 부조리에 여성들은 숨이 턱턱 막힐 지경이다. 남성에게 주어지는 육아휴직 기회는 주변의 눈치를 살피게 하는 등 아직까지 유명무실한 경우가 많고, 심지어 인사고과에 반영시켜 불이익을 당하는 사례가 비일비재하다.



지영이 몸담았던 회사에서는 여자화장실 몰카 사건으로 발칵 뒤집힌다. 지영 역시 몰카 공포증 때문에 늘 두려움을 안고 살아가야 하는 처지이다. 영화에서는 지영이 아기의 기저귀를 갈아준 뒤 지하철역 화장실에 들르지만 혹시 설치되어있을지 모를 몰카 때문에 결국 볼일을 보지 못한 채 돌아서는 장면이 등장한다. 이러한 현상이 비단 영화 속에서만 벌어지는 일일까? 여성들이 안심하고 살아가기에는 우리가 사는 곳은 여전히 위험천만한 세상이 아닐까? 


김팀장의 권유로 다시 일을 할 수 있게 된 지영. 하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아기 맡길 곳을 찾지 못해 전전긍긍해하던 찰나 다행히 대현이 육아휴직을 신청하기로 하였으나 이번에는 시어머니의 벽에 부딪히고 만다. 그녀의 관점에 따르면 남성의 자아실현은 무조건 당연한 거였고, 여성의 자아실현은 뒷전이었다. 남녀 소득 격차 따위의 현실적인 문제도 이러한 논리에 한 몫 더했다. 이를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보던 지영의 친모(김미경). 그녀가 직접 나서서 자신이 아기를 돌보겠다고 자청하였으나 지영은 이를 끝내 받아들일 수가 없다.



독박육아로 지영이 어려움을 겪게 되자 남편과 어머니는 어느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나서서 그녀에게 도움의 손길을 건넨다.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82년생 김지영은 나름 인복이 있는 셈이다. 하지만 정확히 거기까지였다. 육아를 끝까지 책임져야 하는 당사자는 결국 지영 혼자였고, 주변 사람들은 제아무리 열심히 거든다 한들 조력자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영화는 대현과 지영의 아버지 등 여러 남성들을 등장시키지만, 여성들이 겪고 있는 작금의 어려움을 결코 이들 남성들에게 직접적인 책임을 전가시키거나 묻지 않는다. 오히려 대현은 그 어떤 남성보다 다정다감하며 살가운 남편상으로 그려져 있다. 지영이 부럽게 다가올 정도로 말이다. 


영화는 82년생 김지영이라는 매우 현실적인 인물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이야기를 차분히 그려내고 있다. 극 중 김지영이 장모가 되거나 할머니가 되어 무심코 던지는 말들은 관객들에게 카타르시스가 되어 몸속 어딘가에 응어리져있던 것들을 깨끗이 씻어내고 따스한 위로로 다가오게 한다. 우리와 결코 동떨어진 이야기가 아닌, 나와 너 그리고 우리 모두가 겪어왔거나 경험하게 될 너무나도 현실적인 이야기이기에 많은 이들이 공감을 표시하는 게 아닐까 싶다. 



감독  김도영   


* 이미지 출처 : 롯데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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