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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격차를 줄여야 하는 이유 '죽음의 격차'

새 날 2019. 8. 22. 1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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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청문회도 개최되지 않은 상황에서 법무부 장관 후보자를 둘러싼 각종 의혹이 벌써부터 불거지고 있다. 그중에서도 딸과 관련한 이슈가 가장 뜨겁다. 50억 원대의 자산과 남부럽지 않은 사회적 지위. 딸의 입시 과정에서 이러한 요소가 반영된 게 아닌가 하는 의혹으로 인해 사회적 공분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당사자가 가짜뉴스라고 해명하고 나섰다. 하지만 그의 딸과 관련한 이슈는 부모 잘 만난 정유라가 “돈도 실력”이라는 발언으로 국민들의 공분을 샀던 것에 빗대어 ‘조유라’라는 비아냥으로 되레 확산되고 있으며, 청와대 국민청원게시판에 관련 청원이 올라올 정도로 관심이 뜨거워지고 있다. 2030 청년들의 시위 계획도 알려졌다.


계층 이동을 가능케 했던 사다리는 대부분 사라졌다. 개인의 노력보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부에 의해 미래의 계급이 결정된다는, ‘금수저’ ‘흙수저’로 대변되는 계급론이 확고하게 자리를 잡은 세상이다. ‘헬조선’이라는 자조적 표현은 아마도 정유라가 “돈도 실력”이라는 궤변으로 동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을 좌절시키고 분노케 했던 그즈음 절정을 이루지 않았나 생각된다.



정유라로부터 촉발된 사회적 분노는 결국 박근혜 정권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정권을 탄생시키는 데 일등공신 역할을 하게 된다. 물론 그렇다고 하여 신자유주의로 대변되는 물적 토대까지 완전히 뒤바뀐 건 아니다. 부와 계급 등 우리의 일상을 옥죄어온 모든 격차를 인정할 수밖에 없음이 올바른 현실 인식일 테다. 


작금의 분노는 소박한 기대마저 무너뜨리게 하는 등 사회적 경제적 격차, 즉 현대적 계급론을 고스란히 인정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뜨악한 현실로부터 기인한다. 안타깝게도 금수저 흙수저 따위의 계급론을 기반으로 한 삶의 격차는 엄연한 현실이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부 외에는 개인의 재능이나 역량을 꽃피울 수 있는 사회적 자원이 희박한 현실 속에서 사람들은 점차 고립되어 가고 있다. 더욱 안타까운 건 이러한 삶의 격차가 죽음의 격차로까지 이어지게 한다는 사실이다.


ⓒ빈티지하우스


<죽음의 격차>의 저자 니시오 하지메는 일본의 법의학자다. 지난 20년 동안 모두 3,000여 구의 시신을 부검했다. 도서 <죽음의 격차>는 그간 그의 경험을 통해 각각의 주검에 얽힌 사연을 소개하고, 법의학자로서 직접 목격한 삶과 죽음의 격차에 대해 담담하게 소회를 밝히고 있다.


책의 내용에 따르면 부검대 위에서 법의학자를 맞이하는 대부분의 주검은 병원에서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두는, 이른바 평온한 죽음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법의학 용어로 표현하자면 변사한 사람들이다. 부검 현장에서는 이러한 현상이 보통 상황이 된다고 한다. 


저자가 부검한 주검과 관련한 통계를 살펴보았더니 전체의 약 50%는 독거자였으며, 약 20%는 생활보호수급자, 10%가량은 자살자였다고 한다. 그 가운데 30% 정도가 정신질환자였으며, 치매 환자는 전체의 5%에 달했다. 신원 미상의 죽음도 전체의 약 10%에 이른다고 한다. 


이러한 결과와 관련하여 눈치가 빠른 이들은 대충 감을 잡았겠지만, 부검대 위로 올라온 주검들은 하나 같이 취약계층에 해당한다. 저자의 부검 사례를 되돌아보니 그들은 대체로 사회적 약자의 위치에 있었던 것이다. 저자는 이 숫자만으로도 변사체가 된 죽음 자체가 사회의 어두운 이면에 속해 있다는 명백한 증거가 된다고 힘주어 주장한다. 그러니까 삶의 격차가 결과적으로 죽음의 격차에까지 이르게 한다는 것이다. 


수많은 종류의 ‘격차’가 언급되는 현실 속에서 저자가 굳이 죽음의 격차를 화두로 꺼내든 데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너무도 당연한 이야기 같지만, 죽음의 격차를 줄이기 위해서는 결국 삶의 격차를 줄여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삶의 격차를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피력하고 있다. 



개인의 역량 발휘와 노력에 의해서라기보다 부모의 재산 및 사회적 지위 등에 의해 일개인의 미래가 결정되는 사회에서는 그나마 기회가 평등하고, 과정이 공정하며, 결과가 정의로워야 삶의 격차를 조금이라도 줄여나갈 수 있고, 희망이라는 것을 꿈꿔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작금의 법무부 장관 임명을 둘러싼 논란은 대중들로 하여금 이러한 희망이 훼손당했다는 자괴감으로부터 기인한다. 


나는 직업상 ‘죽음’을 통해 세상을 보는 부분이 있다. 나에게 ‘삶’은 당연하지 않다. 오히려 매일 대면하는 부검대 위의 죽음이 나의 일상이다. 자살을 제외하고 인간은 죽는 방법을 고를 수 없다. 누구라도 바람에 날려온 우산에 찔려 절명하는 것은 싫다. 하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힘으로 죽음을 피할 수는 없다. 아무리 열심히 성실히 살아도 암에 걸리기도 하고,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 휘두른 칼에 느닷없이 찔리기도 한다. “선택할 수 없다”는 의미로만 말하자면 역시 죽음은 만인에게 평등할지도 모른다. 


수많은 죽음을 다뤄오면서 터득한 진실 하나, 내게 삶은 당연하지 않다는 저자의 표현은 우리의 삶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절실히 깨닫게 하는 대목이다. 아울러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례 외에 어떠한 경우에도 죽음은 선택의 여지가 없기에 만인에게 평등하다는 저자의 주장은 삶의 격차가 죽음의 격차에 이르게 하는 작금의 현실을 더욱 씁쓸한 느낌으로 다가오게 한다.


‘죽음’이 있어서 ‘삶’이 있다. 나는 “죽음을 의식하지 않고” 생을 마치고 싶다. 오히려 마지막까지 전력을 다해 살아갈 것만을 생각하고 싶다. ‘삶’에 집착하고 싶지는 않지만, 나에게는 오늘 바로 앞에 있는 현실을 열심히 살아가는 쪽이 중요하다.


끝으로 어느 누구보다 많은 죽음을 다루고 있기에 오히려 죽음을 의식하지 않고 생을 마치고 싶다는, 마지막까지 하고 싶은 일을 다 하며 전력을 다해 살아갈 것이라는 저자의 소박한 주장은 오늘도 죽지 못해 힘겹게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들이 곱씹어볼 만한 대목이 아닐까 싶다.



저자  니시오 하지메   


역자  송소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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