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접 경험의 즐거움

절대적인 정의의 잣대는 옳은가 '절대정의'

새 날 2019. 8. 18. 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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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보라빛 봉투에 고급스러운 꽃무늬가 양각으로 새겨진 초대장을 받아 든, 서로 절친 사이인 가즈키, 유미코, 리호, 그리고 레이카는 화들짝 놀란다. 초대장의 발송인을 확인한 결과 5년 전 숨진 노리코의 명의로 되어있었기 때문이다. 숨진 사람이 어떻게 초대장을 보낼 수 있는 걸까?

그렇다면 죽은 노리코가 살아있기라도 한 것일까? 그게 아니라면 누군가가 장난질을? 네 사람 가운데 하나일까? 풀리지 않는 의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노리코의 죽음과 깊은 관련이 있는 이들 네 사람은 예기치 않은 그녀의 초대에 어찌 대응해야 할지 몰라 좌불안석이다.

사건은 5년 전, 아니 그보다 훨씬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교시절 네 사람은 단짝으로, 뭐든 함께였다. 노리코는 다른 학교에서 뒤늦게 전학을 왔고, 평소 단정한 외모와 똑 부러지는 행동 덕분에 자연스레 네 사람의 무리에 끼어들게 된 것이다. 노리코는 이른바 바른생활 소녀인 데다 성적도 좋아 교사나 학부모로부터 좋은 평판을 얻고 있었다.

그녀와 함께 생활해온 네 친구들의 성적도 노리코 덕분에 덩달아 높아졌다. 이러한 변화 탓에 학부모들은 가장 훌륭한 친구감으로 두 말 없이 노리코를 꼽곤 했다. 학교도 노리코의 존재를 내심 자랑스러워했다. 어느새 노리코는 해당 지역에서 가장 신뢰받고 영향력 있는 학생으로 성장해 있었다.



노리코는 잘못된 상황은 반드시 바로잡아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의 소유자였다. 아니 단순히 바로잡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었다. 정의라는 이름으로 단죄하거나 처벌까지 이뤄져야 했다. 그녀는 단호했다.

네 친구들은 자신들이 궁지에 몰릴 때마다 노리코가 인정사정없이 휘두르는 이러한 정의의 잣대에 의해 여러모로 도움을 받게 된다. 친구들의 입장에서는 그런 그녀가 더없이 고마웠다. 그녀는 누가 뭐라 해도 정의의 수호천사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차츰 친구들은 그녀의 행동이 과도하다는 걸 깨닫게 된다.

상대방의 처지나 입장을 고려하지 않고 막무가내로, 그리고 융통성 없이 정의의 잣대가 일상생활의 세세한 부분까지 파고들어오는 바람에 숨이 턱턱 막히는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노리코의 행동은 자신이나 누군가를 이롭게 하기 위함이 아닌, 오롯이 정의라는 잣대에만 기댈 뿐이었다. 정의라는 표현을 사용할 때마다 그녀의 얼굴엔 미소가 절로 그려지곤 했는데, 이는 언젠가부터 친구들에게는 섬뜩함 그 자체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절친인 네 명의 친구들에게도 노리코의 잣대는 변함없었다. 정의의 사도 노리코는 학교를 졸업한 뒤에도 학창시절 때처럼 변함없이 친구들의 곁을 배회하며 어려움을 도와주는 등 특급 도우미 역할을 자처한다.

그랬던 그녀가 정확히 5년 전 이 친구들로부터 살해당했다. 노리코는 무엇 때문에 친구들에 의해 죽임을 당한 것일까? 아울러 이미 숨진 노리코가 보냈다고 하는 초대장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


ⓒ아프로스미디어


우리는 간혹 규범 등을 철저히 지키고 따르며 살아가는 사람을 우스갯소리로 FM(야전교범)대로 살아가는 사람이라 호칭하곤 한다. 소설 <절대정의>는 노리코라는, FM대로 살아가고자 하는 인물을 주인공으로 등장시킨다. 그녀는 사사건건 규범과 법을 언급하면서 잘잘못을 따지고 잘못한 사람을 단죄하려 든다.

하지만 상대의 처지와 입장을 고려하지 않은 무조건적인, 그러니까 절대적인 정의의 잣대는 폭력 행위에 다름 아니다. 노리코와 절친 사이인 네 명의 친구들에게도 처음에는 정의의 몬스터처럼 다가왔던 노리코가 시간이 지날수록 미저리과로 변모하게 된 건 다름 아닌 그러한 연유가 크게 작용한다.

소설은 노리코와 네 명의 친구 사이에 얽혀있던 사건들을 친구별로, 그리고 시간대별로 풀어헤치며 상세히 묘사하고 있다. 이를 읽어 내려가다 보면 친구들이 왜 노리코를 죽일 수밖에 없었는지, 머리로는 받아들일 수 없어도 심정적으로는 절로 수긍케 된다. 의문의 초대장으로부터 시작된 이야기는 깊숙이 진행될수록 노리코의 절대정의의 잣대가 과도하다는 사실을 파헤치며 흥미진진하게 전개된다. 미스터리 장르답게 반전 요소도 적절히 배치돼있다.



소설 <절대정의>는 단순한 재미만 추구하지 않는다. 근래 온라인상에서는 타인에 대한 단죄 행위가 너무도 쉽게 빚어지곤 한다. 정의라는 이름으로 누군가를 단죄하고 나면 뇌의 쾌락을 담당하는 부위가 활성화하여 마약을 했을 때와 비슷한 쾌감을 얻는다고 하는데, 이로 인한 현상일까?

"현대 사회에는, 특히 인터넷이나 SNS에는 ‘정의’를 내세우며 개인이나 단체를 단죄하려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손에 들고 있는 키보드나 스마트폰은 정의의 여신이 들고 있는 저울도 아니고, 신처럼 지껄이는 그들의 발언 역시 절대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가짜 저울을 들고 신인 양 행세를 하면 반드시 그 화살은 자신에게도 돌아올 것입니다."

옮긴이의 글에서도 언급되고 있듯이 인터넷과 SNS가 만개한 시대, 우리는 너무나 쉽게 타인을 단죄하고 있지는 않은지 반성하게 된다. 이와는 성격이 조금 다른 측면이지만 소설 속 노리코가 절대정의의 잣대를 들이대며 절친들의 숨통을 조이더라도 그녀의 주장이 결코 틀린지 않은 탓에 꼼짝할 수 없었던 사례처럼 우리 사회가 정의롭고 올바르게 돌아가려면 누군가는 노리코와 같은 역할을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문득 든다. 

이는 결국 균형 잡기의 문제 아닐까 싶다. 둘 사이의 적절한 균형이 무엇보다 중요해지는 시대다.



저자  아키요시 리카코 


역자  주자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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