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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본질에 대해 던지는 묵직한 질문 '산책하는 침략자'

새 날 2019. 2. 14. 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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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론가 사라졌다가 며칠 만에 나타난 신지(마츠다 류헤이)는 어딘가 이상했다. 넋이 나간 듯한 그의 행동은 결코 예전의 신지라고 볼 수 없었다. 그는 스스로를 외계인이라고 했으며, 아내인 나루미(나가사와 마사미)가 자신을 돕는 가이드라고 주장했다. 그는 매일 마을 주변으로 산책을 다녀오곤 했다.

한편 그 무렵 마을에서는 끔찍한 살인 사건이 발생했다. 저널리스트 사쿠라이(하세가와 히로키)는 이 살인 사건을 취재하는 과정에서 행동이 조금은 이상한 청년 아마노(타카스기 마히로)를 만나게 되고, 이후 예상치 못한 일들이 자꾸만 벌어진다.

인간의 신체를 숙주 삼은 외계인의 등장

영화 <산책하는 침략자>는 인간의 몸에 침투한 외계인들이 지구 침략을 위해 인간이 소유한 개념을 수집하고 인류를 말살하려는 과정에서 가족, 소유, 사랑 등 개념의 상실을 통해 인간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가를 묻는 작품이다.



영화는 아내 나루미를 가이드 삼아 주변 사람들의 개념을 빼앗는 신지의 몸을 빌린 외계인, 그리고 사쿠라이를 가이드 삼아 주변 사람들의 개념을 빼앗고 지구 침략을 위해 준비하고 있는 아마노와 타치바나(츠네마츠 유리)의 몸을 빌린 외계인, 이렇듯 두 축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피칠갑을 한 살인 사건 장면으로부터 영화는 시작된다. 외계인의 침략이 그려내는 참상을 떠올릴 법한 장면이다. 하지만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간다. 기대했던 외계인의 실체는 드러나지 않은 채 단지 사람의 신체를 숙주 삼아 우리 주변의 평범한 사람들의 형태로 그려나가기 때문이다. 거대 스케일로 다뤄온 할리우드식 흔한 SF 액션물을 연상하면 큰 오산이다. 이와는 달리 해안가의 작은 항구 마을에서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과 그 주변인들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영화 <산책하는 침략자>는 일본 극단 ‘이키우메’의 인기 연극 <생매장>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아울러 제70회 칸 국제 영화제의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 초청된 작품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에서는 창작집단 ‘LAS’가 지난해 11월 8일부터 11일까지 영화와 동일한 제목으로 국내 연극 무대에 올린 바 있다.

비주류를 향한 감독의 따뜻한 시선

외계인들이 지구 침략에 앞서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 있었다. 바로 사람들의 개념을 수집하는 일이었다. 때문에 신지를 숙주 삼은 외계인이나 아마노 및 타치바나를 숙주 삼은 외계인들은 각기 다른 위치에서 이 개념 수집에 여념이 없었다. 사람으로부터 탈취한 개념이 일정량 쌓이게 되면 이를 발판 삼아 비로소 지구 침략에 나서기로 계획돼있었기 때문이다. 영화는 인류에게 더없이 소중한 이 개념을 빼앗긴다는 비극적인 요소를 희극적인 방식으로 그려나간다.

외계인으로부터 개념을 상실하게 되면 그 사람은 더 이상 해당 개념을 인식할 수가 없다. 외계인들이 수집해가는 개념은 우리의 삶에 없어서는 안 되는 매우 소중한 것들이다. 이를테면 가족, 소유, 일, 자신, 타인 따위의 것들이다. 개념을 상실한 사람들 가운데는 이로 인해 괴로워하는 이들이 많았고, 도리어 그동안 삶을 짓눌러오던 것들로부터 해방되어 쾌재를 부르는 사람들도 더러 있었다.



은둔형 외톨이로 외부와 철저하게 단절된 채 자기 안에 갇혀 지내오던 한 청년은 ‘소유’라는 개념을 빼앗긴 뒤 오히려 천형 같던 굴레로부터 벗어나 세상을 향해 자신 있게 뚜벅뚜벅 걸어 나간다. 일에 중독되어 오로지 일밖에 모르던 출판사 사장은 ‘일’이라는 개념을 빼앗긴 뒤 비로소 중압감에서 해방된다.

고졸 출신에 승진시험도 번번이 떨어져 자존감이 크게 낮았던 형사는 ‘자신’과 ‘타인’이라는 개념을 동시에 빼앗기면서 오히려 자존감을 되찾게 된다. 감독은 바로 눈앞에서 펼쳐지는 일들조차 믿지 못하게 만드는 사회 시스템 속에서 이로 인해 고통을 받거나 주류에 속하지 못하는, 이른바 비주류에 해당하는 이들에게 시선을 돌리며 따듯한 관심을 드러내고 있었다.



인간의 본질에 대해 던지는 묵직한 질문

신지를 숙주 삼은 외계인, 그리고 아마노와 타치바나를 각기 숙주 삼은 외계인들은 그들이 목적하던 대로 마침내 한 지점에서 합류하게 된다. 지구 침략의 시점이 가까워온 것이다. 이들의 행동은 자못 심각했고 지구의 상황도 외계인의 침략을 앞둔 절체절명의 위기 순간이었으나 왠지 영화 속 현실은 모든 게 어설프기만 했다. 아니 웃프다고 표현해야 하는 게 맞을까?

SF적인 내용임에도 전혀 SF답지 않은, 비극적인 스토리임에도 희극적으로 다가오게 하는, 어쩌면 이러한 모든 아이러니가 바로 이 영화만의 매력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든다. 그러니까 내용은 충분히 깊이 있지만, 그 표현 방식은 심심하기 짝이 없다. 엇박자라고 해야 할까? 아무튼 영화가 끝날 때까지 그러한 느낌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게 한다. 이 영화만의 묘미라고 해두자.



인간의 주요 개념을 무사히 빼앗은 외계인들은 마지막 남은 개념 앞에서 혼돈을 겪게 된다. 바로 ‘사랑’이다. 사실 이 개념은 우리 인간에게도 복잡 미묘한 종류의 것이다. 마지막으로 남은 개념과 정면으로 맞닥뜨리게 된 외계인들, 이들의 일관된 침략 계획은 과연 어찌될는지...

영화 <산책하는 침략자>는 외계인의 침략이라는 독특한 소재를 통해 인간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무엇인지, 인간의 본질에 대해 묵직한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다.



감독  구로사와 기요시   


* 이미지 출처 : 와이드 릴리즈(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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