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접 경험의 즐거움

자신의 직분에 최선을 다해야 하는 이유 '1987'

새 날 2017. 12. 29. 1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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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1월,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경찰의 조사를 받던 서울대생 박종철 군이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당황한 경찰은 늘 해왔던 것처럼 대공수사처 박처장(김윤석)의 지휘 아래 시신 화장을 시도하기로 한다. 증거 인멸을 위함이다. 그러나 일종의 요식 행위에 가까웠던 시신 화장 절차와 관련하여 의외로 윗선의 온갖 압박과 회유에도 불구하고 검찰이 이를 완강히 거부, 부검을 요구해 온다. 그 중심에는 부장검사인 최검사(하정우)가 자리하고 있다. 


덕분에 경찰의 화장 시도는 결국 물거품이 되고, 유가족의 입회 하에 부검이 실시된다. 어느 누가 보아도 고문에 의한 질식사임이 명백한 사건이었다. 하지만 경찰만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은 채 단순 쇼크사로 일관되게 밀어붙인다. 수상한 낌새를 눈치 챈 윤기자(이희준)는 악착 같이 사건의 배후를 훑는 등 진실을 캐기 위해 몸을 사리지 않던 도중 이번 사건의 모든 정황이 물고문에 의한 질식사임을 일제히 가리키자 이를 대대적으로 보도하기에 이른다. 



세상은 또 한 번 술렁거린다. 박종철을 살려내라며 대학가를 중심으로 연일 시위가 벌어지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번에도 경찰의 무리수는 계속된다. 고문에 직접 가담한 수사관으로 조반장(박희순) 등을 희생양 삼으려는 시도가 이뤄지는데...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은 우리 현대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족적을 남긴 1987년 6.10 민주항쟁의 단초가 되게 했던 사건이다. 이 영화는 이러한 실화를 모티브로 한다. 30년 전으로 거슬러올라가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이 일어난 뒤 경찰이 이를 어떻게 은폐 조작하려 시도하였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검사, 기자, 교도관, 종교인, 학생 등이 각자의 위치에서 자신들의 신념을 지키며 직분을 다하려는 노력이 더해지면서 민중 항쟁으로 이어지게 했고, 결국 군사독재정권을 끌어내려 오늘날 민주 정치의 기반을 다지게 한 역사적인 사실을 긴박하게 그린다.



차디찬 시멘트 바닥 위에서 물고문 끝에 고통스럽게 숨져간 박종철 군을 떠올리면 비록 30년 전에 일어난 사건임에도 여전히 가슴 한켠이 아려온다. 당시엔 박종철 군과 비슷한 또래로서 그의 죽음이 남 일 같지 않게 다가왔고, 30년이 훌쩍 지난 지금은 그와 비슷한 또래의 자식을 키우는 입장이 된 터라 또 다시 남 일처럼 다가오지 않는다. 그의 황망한 죽음 앞에서 부군은 "종철아 잘가그레이, 이 애비는 할 말이 없데이" 라며 목놓아 울부짖는다. 


이른바 대공수사를 전담하던 경찰의 대공수사처 내부는 광기로 가득 들어차 있는 곳이다. 재야 인사들을 간첩으로 둔갑시켜 사회로부터 영원히 격리시키고, 이를 기반으로 권력을 안정적으로 유지시키려는 게 그들의 주된 임무였으며, 사회 참여에 나선 박종철 군과 같은 학생들을 잡아넣은 뒤 고문을 통해 함께 활동한 동료를 실토케 하거나 용공 조직에 가담했다는 거짓 증언을 유도하기도 한다. 



박종철 군과 비슷한 또래의 학생들을 가둬 고문을 일삼던 대공분실은 숱한 이들의 고통스런 울부짖음과 몸부림이 고스란히 배어있는 곳이다. 빨갱이들을 전부 처단해야 한다며 공공연하게 떠들고 다니던 박처장과 그의 휘하에서 박처장을 떠받들겠다며 충성을 다짐하던 요원들에게는 그들 스스로가 곧 법이었다. 군사독재정권인 권력의 든든한 비호 아래 그들의 폭력에 의해 수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고통 속에서 신음을 내뱉어야 했다. 세상 두려울 게 없던 그들이다.



6.10 민주항쟁이 학생을 비롯한 수많은 시민이 하나가 되어 이뤄낸 성과였듯이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 역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위치에서 각자의 직분을 다했기에 세상에 그 전모가 드러날 수 있었으며, 6.10 민주항쟁의 도화선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당시 검사가 시신 화장을 요청하는 경찰의 문서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고 그대로 도장을 찍어주었다면 이번 사건 역시 과거의 비슷했던 의문사처럼 그대로 묻히고 말았을 가능성이 높다. 


의사가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잊은 채 부검 소견마저 거짓으로 일관했다면 어땠을까? 생각만으로도 끔찍하지 않은가? 기자들이 근래 기레기라며 욕을 많이 먹고 있는 입장이지만, 당시엔 보도지침이 내려져있을 만큼 최악의 환경 하에서도 진실을 밝히려는 노력은 지속적으로 이어져왔다. 이 추악한 범죄 사실이 들춰지고 세상의 환한 빛을 보게 된 건 순전히 그들의 노력이 뒷받침되었던 덕분이다. 



고문 치사 사건이 세상에 알려진 뒤 이를 축소은폐하려 했던 경찰의 시도는 불난 집에 부채질을 한 격이었다. 비슷한 시기 전두환 전 대통령의 호헌 조치로 시민들의 속이 가뜩이나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있던 상황이라 더더욱 그러했다. 이러한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기까지는 정말로 많은 사람들의 노고가 숨어있다. 교도관과 종교인 그리고 폼나게 원서를 가슴에 안은 채 '마이마이'를 통해 음악을 들으며 그저 미팅에 나갈 생각에 부풀어있던 대학 새내기의 용기 있는 메신저 역할까지, 이렇듯 수많은 이들의 보이지 않는 노력이 더해져 이뤄낸 성과물이었다.



이 영화에서 '연희'로 분한 배우 김태리는 당시 사회 변혁을 외치며 시위에 나선 이들을 향해 가족들 걱정은 않는, 오로지 자기 자신밖에 모르는 지극히 이기적인 사람들이라고 폄하한다. 잔혹하기 이를 데 없는 박처장은 일반인들이라면 결코 겪을 수 없었을 남다른 가족사를 갖고 있었으며, 그 때문인지 고문을 일삼거나 상대를 회유할 때마다 당사자들의 가족을 들먹거리곤 한다. 가족 앞에서는 누구라도 무너질 수밖에 없음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에 이러한 심리를 교묘하게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연희는 자신의 삼촌인 교도관(유해진)이 경찰에 끌려가 모진 고초를 겪게 되면서 왜 학생들이, 그리고 시민들이, 길거리로 나서서 돌을 던지고 권력에 저항할 수밖에 없었는가를 비로소 깨닫는다. 자기 자신만이 아닌 바로 가족들을 진정으로 위하고 사랑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그녀는 박종철을 살려내라고 외치는 장엄한 시위대의 물결 속으로 자연스럽게 합류하며 하나가 된다. 



다양한 배우들이 극 곳곳에서 얼굴을 드러낸다. 안기부장 문성근, 이한열 열사로 분한 강동원, 재야 운동권 김정남 역의 설경구, 이부영 역의 김의성, 신문사 부장으로 등장한 오달수, 박종철 삼촌 역의 조우진, 또 다른 신문사 사회부장인 고창석 등 정말로 많은 배우들이 참여했다. 모두가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자신의 자리에서 직분을 다한 끝에 그날의 끔찍했던 사건이 세상의 빛을 보게 되고 시민들의 저항을 이끌어내더니 마침내 오늘날과 같은 정치 체제를 만들었듯이, 이 영화 역시 수많은 배우들이 극의 비중에 관계 없이 자신의 역할에 최선을 다하면서 이러한 멋진 작품이 탄생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감독  장준환


* 이미지 출처 : 네이버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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