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접 경험의 즐거움

사회 갈등 구조를 개인 심리로 풀어낸 수작 '여교사'

새 날 2017. 12. 31. 2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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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효주(김하늘)는 모 사립고등학교의 화학 교과 교사다. 그러나 신분상 교사라고 하여 모두가 같은 급의 교사는 아니다. 그녀는 계약 기간이 만료될 때마다 계약 연장 여부를 걱정해야 하는, 정교사가 아닌 기간제 교사다. 


어느 날의 일이다. 박효주와 동일한 화학 교과 정교사로 추혜영(유인영)이 새로 부임해 온다. 오랜 기간, 그리고 열심히 기여한 덕분에 다음 인사 땐 박효주가 정교사로 거의 낙점되다시피 하던 상황이었거늘 이게 도대체 무슨 영문인가 모르겠다. 이러한 결과는 학교 구성원 모두를, 특히 당사자인 박효주를 당혹스럽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그 배경은 더욱 뜨악할 지경이다. 추혜영은 사학 재단인 이 학교 이사장의 딸이었다. 



추혜영은 젊은 데다가 외모마저 출중하여 박효주가 갖고 있지 못한 걸 거의 다 갖춘 완벽에 가까운 여성이었다. 게다가 그녀가 박효주의 대학 후배라는 사실은 박효주를 더욱 탐탁치 않게 하는 요소였다. 박효주의 입장에서는 추혜영이란 인물은 왠지 본능적으로 처음부터 가까이하고 싶지 않은, 적극적으로 기피하고픈 사람이었으나 추혜영은 외려 자신의 선배라는 이유로 그녀에게 더욱 살갑게 다가온다. 이런 아이러니가 다 있나. 이러한 사이를 우리는 운명이라고 부르는 걸까?



한편 박효주가 다른 정교사의 출산 휴직으로 임시 담임을 맡게 된 학급에는 무용 특기생 심재하(이원근)라는 학생이 있었다. 이 아이는 다른 학생들과는 달리 무용 특기로 대학 진학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가정 형편이 여의치 않아 사교육을 받을 수 없는 상황이었고, 이로 인해 학교 체육관에 홀로 남아 늦게까지 연습을 해야 하는 처지였다. 그날도 박효주는 학교에 남아 연습 중인 심재하를 돌아보기 위해 체육관에 들렀다. 그 때였다. 사제지간인 추혜영과 심재하가 서로의 육체를 탐닉하는 뜨악한 장면이 박효주의 시선에 들어오게 되는데...



박효주의 삶은 되는 게 하나 없다. 정교사가 아닌 기간제 교사로 시작한 교직 생활은 온통 지뢰밭투성이다. 학교에 몸담은 지 수년이 지났고 나름 열심히 했기에 인정도 받는 편이었으나 여전히 계약 만료 시점만 되면 재계약을 걱정해야 하는 판국이었으니 말이다. 학교 재단 측에서는 기간제 교사들의 재계약과 정교사 임용이라는 미끼를 무기로 그들의 노동력을 값싸게 이용하곤 한다. 이를테면 정교사들은 모두가 맡기를 꺼려하는 특정 학년의 담임을 그들에게 전담시키거나 수행평가처럼 귀찮고 손이 많이 가는 일들을 정교사에게는 아예 할당하지 않고 대부분 기간제 교사들의 몫으로 던져주곤 한다. 



하지만 그들은 이러한 차별 대우를 당해도 마땅히 하소연할 데가 없었다. 기간이 만료되면 다시 계약을 맺어야 하고 조금 더 멀리 바라볼 경우 정식 임용까지 기대해야 하는 아쉬운 처지이기 때문이다. 박효주 역시 마찬가지 입장이었다. 학교에서 시키는 대로 묵묵히 따라야만 했다. 반면 추혜영은 박효주보다 한참이나 뒤늦은 후배였음에도 아버지가 학교 이사장이라는 이유만으로 박효주의 차례로 점찍어둔 정교사의 자리를 단번에 꿰차는 필살기를 선보인다. 


뿐만 아니다. 이후 학교 생활 또한 이사장이라는 든든한 뒷배 덕분에 걱정거리라곤 하나도 없어 보였다. 동료 교사들은 이사장 딸인 추혜영과 친해지려고 노골적으로 접근하거나 눈치를 보는 처지였지만, 가뜩이나 불안한 삶의 연속선상에 놓여 있던 박효주에게 있어 추혜영은 자신의 몫을 앗아가고 이후의 삶마저 위태롭게 하는, 그저 눈엣가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존재로 다가오던 찰나다. 두 사람 사이에 흐르던 묘한 긴장감은 시간이 흐를수록 점입가경의 막장 상황으로 치달아간다.



박효주와 10년 간 사귀다가 동거하게 된 남친(의희준)은 기약 없는 미래에 저당 잡힌 채 오늘도 글을 쓴다며 거의 백수와 유사한 생활을 하고 있는 입장이다. 추혜영의 등장은 박효주의 생존에는 위협적이자 치명적인 요소였다. 방어기제의 작동은 아주 자연스러웠다. 추혜영의 등장과 동시에 날이 곤두선 박효주의 신경은 평소와 다름 없이 지내던 남친에게 느닷없는 흉기로 돌변, 두 사람의 관계에 결국 파탄을 일으키고 만다. 박효주의 심리 상태는 곧추세우고 싶은 자존심과 반비례하는 등 이러한 환경적인 영향을 크게 받는다. 


학교라는 공간적 배경은 경직되고 폐쇄적인 느낌을 살리기엔 더없이 훌륭한 도구다. 표정과 침묵만으로 팽팽한 긴장감을 연출해낸 김하늘의 연기는 이러한 배경과 절묘하게 어우러졌기에 더욱 빛을 발할 수 있었을 테다. 그녀의 심리 연기는 가히 압권이라 할 만한 것이었다. 불안하기 짝이 없는 김하늘의 정신 상태를 고스란히 드러내던 조용하지만 거침없었던 내면 연기와 실재 교사처럼 리얼함으로 승부한 동료 배우들의 열연 덕분에 극의 긴장감은 더욱 배가될 수 있었다. 



똑같은 일을 하지만, 아니 오히려 더 많은 일을 하면서도 우리 사회 곳곳에 존재하는 정규직 및 비정규직의 넘을 수 없는 차별이라는 현실적인 장벽, 여기에 이러한 장벽마저 사실상 한꺼번에 무너뜨릴 수 있는 막강한 배경을 손에 쥐고 태어난 이른바 금수저와 그렇지 못한 흙수저, 이러한 요소들과 정면으로 맞닥뜨리게 된 박효주의 기구한 운명은 그녀의 무너진 자존심만큼이나 심리 상태를 바닥 저 아래 깊숙한 곳으로 심하게 내동댕이쳐버린다. 급기야 신경마저 극도로 쇠약해져간다. 



그녀가 벌여놓은 뒤 수습하지 못한 일련의 사건들에 대해 단순히 일개인에 의한 일탈로 치부해버리기엔 그녀를 둘러싼 환경과 사회적 제반 여건이 지나치게 취약하게 다가온다. 무엇이 박효주 그녀를 괴물로 만든 것일까? 그녀에게 누가 과연 돌을 던질 수 있을까? 학교라는 조금은 특별한 공간에서 벌어지는 금기, 그리고 이를 매개로 실추된 자존감을 회복하려던 한 여성의 처절하게 무너져버린 내면, 이를 통해 우리 사회가 현재 안고 있는 갈등 구조까지, 이 모든 걸 두루 살펴보게 하는 감독의 뛰어난 연출력과 혜안, 여기에 김하늘의 미친 듯한 연기력까지 더해진, 상당한 수작이다.



감독  김태용


* 이미지 출처 : 네이버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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