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편린들

적어도 혹한기엔 '학생다움'을 잠시 내려놓자

새 날 2016. 12. 31. 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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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바람이 꽁꽁 여민 옷속을 깊숙이 파고들며 살을 엔다. 몹시도 추운 계절이다. 그런데 이 예사롭지 않은 추위 속에서도 일부 중고등학교에서는 여전히 교복 위에 외투를 마음대로 걸치지 못하게 하는 모양이다. 몸을 오들오들 떠는 상황에서도 간혹 외투를 걸치지 않은 아이들을 바라보면서 난 의아한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도대체 무슨 연유 때문에 아이들을 이 혹독한 한파 속에서 추위에 떨도록 그대로 방치하고 있는 걸까? 아이들이 그 여리디 여린 몸으로 추위까지 오롯이 감내해야 할 만큼 어떤 대단한 명분이 존재하길래, 이 매서운 혹한 속에도 옷 하나 마음대로 걸치지 못하게 하는 걸까? 


물론 그와 관련하여 일선 학교도 나름의 고충이 없는 건 아닌 것 같다. 그러니까 외투 규제의 가장 큰 명분은 학생 신분에 어울릴 법한 단정함 따위에 최고의 가치를 부여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외투를 입으면 외모에만 신경을 기울일 테니 '학생다움'과는 거리가 멀어진다는 의미일 테다. 아울러 사복을 입을 경우 교복 착용의 취지가 흐려지고 학교의 교풍마저 어지럽혀질 우려가 있으니 질서와 규칙이라는 교육적인 측면도 고려한 듯싶다. 다른 한편으로는 고급 외투를 입은 학생과 그렇지 않은 학생 사이에서 응당 조성될 수 있는 위화감 같은 것들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를 마련한 것일 수도 있다. 


ⓒ서울신문


듣고 보니 결코 틀린 주장은 아닌 것 같다. 다른 무엇보다 수년 전 특정 회사 브랜드의 패딩이 한반도 전체를 휩쓸며 기이한 현상을 불러일으켰던 기억이 새록새록하니 말이다. 그에 따른 흔적과 상처들은 여전히 우리 사회에 남은 채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지 않은가. 당시의 유행은 정말로 대단한 것이었다. 때문에 교육자의 신분으로서 그러한 현상들을 결코 외면할 수는 없었을 테고, 따라서 앞서 언급한 사안들에 대해 한 번쯤 마땅히 고민해봤음직한 주제들임엔 틀림없다. 


그런데 해당 사안을 접한 난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그동안 학교라는 울타리가 그들이 흔히 말하곤 하는 '학생다움'이나 교칙 학칙 따위와 같은 온갖 규칙을 지켜야 한다는 명분으로, 그러니까 본질보다는 당장 눈앞에 보이는 형식에만 치중, 편의주의에 매몰된 채, 아이들의 자유를 지나칠 정도로 속박하고 옭아매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점 말이다. 나 또한 교육자들이 주장하는 사안이 결코 틀렸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교육적 효과를 바란다면 최소한의 규제의 필요성을 간과할 수는 없을 테니 말이다.


다만, 내가 중고등학교를 다닐 적에 느꼈던 그 반인권적이고 억압적인 분위기가 수십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여전히 아이들의 심신을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놀라우면서도 안타깝게 다가온다. 물론 앞서도 운을 뗐듯 규제라는 게 무조건 나쁘지만은 않다. 특히 청소년기의 아이들에겐 필요악인 경우가 제법 있다. 아이들은 한창 성장하는 와중이고, 올곧은 인성과 가치관을 갖출 수 있도록 사회에 진출하기 전 학교라는 울타리 내에서 충분한 예행 연습을 치를 필요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일부 규제는 필요악인 만큼 이를 시행하더라도 융통성을 발휘하거나 창의적인 방식이 되었으면 좋았을 법하고, 아울러 아이들의 기본권을 최대한 보장해 주는 형태가 되어야 했음에도, 앞서도 언급한 것처럼 내가 다닐 때나 지금이나 강산이 변해도 수차례 변했을 법한 세월이 지났거늘 그다지 차이가 느껴지지 않는 점은 뭐라고 콕집어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참으로 안타깝기 짝이없는 노릇이다. 


학생 외투 규제에 대한 사안은 학생들 스스로가 없어졌으면 하는 과도한 규제 중 하나로 받아들여지는 사안이다. 학생 인권단체인 ‘인권친화적 학교+너머 운동본부’가 지난 9월에서 11월까지 제보받은 반인권적 학칙 사례 107건 중 무려 30%가 학교의 외투 규제에 대한 내용이었다. 언론보도에 따르면 이러한 현실을 진작부터 인지한 각 시도교육청이 일선 학교에 아이들의 교복과 외투 착용에 대한 자율성 보장을 강조해왔으나 여전히 많은 학교들이 이를 바로잡지 않고 있다고 한다. 


ⓒ연합뉴스


그렇다면 교육자들이 그토록 강조하는 '학생다움'이란 과연 무얼까? 이 추상적인 개념 내지 명제 하나가 과연 우리 아이들을 혹한의 추위 속에서도 외투를 걸치지 못하게 할 만큼 그토록 중요한 걸까? 혹시 내가 생각하는 아래의 개념이 맞는 걸까? 무조건 규제를 잘 따르고 통제하기 쉽도록 교복을 잘 갖춰 입은 채 선생님을 비롯한 어른들의 말씀과 지시에 공손히 잘 따르는 순종적인 태도, 아울러 겉으로 드러나는 단정함 따위의 것? 그렇다면 혹시 다수의 교육자들은 과거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여전히 사람이 아닌 로봇이나 괴물 같은 걸 원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학교 선생님들은 이 추운 계절이 돌아오면 두꺼운 옷 등으로 칭칭 싸맨 채 출근한다. 어디 선생님들뿐인가. 교육자가 아닌 사람들 역시 추운 날이면 완전무장한 채 종종 걸음으로 힘겹게 출근한다. 이는 겨울철이면 한반도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낯익은 광경이다. 물론 때로는 아늑하고 따듯하게 덥혀진 승용차로 출근하는 분들도 더러 있을 수 있다. 


반면 우리 아이들은 어떤가. 그 '학생다움'이라는 알 듯 모를 듯한, 수십 년이 흘러도 여전히 변함 없는 전근대적인 가치의 볼모가 되어 외투를 입지도 못한 채 벌벌 떨면서 등교하기 일쑤다. 이 대목에서 난 묻고 싶다. 살을 에일 만큼 혹독한 환경이라면 가장 우선시되어야 할 가치 내지 덕목이란 과연 무엇이 되어야 할까? 누구나 짐작하듯 건강 아닐까? 더구나 그 대상이 아이들이라면 더더욱 그러하지 않나? 교육자들만 이를 모르는 걸까? 


한반도의 혹한기는 제법 매섭지 않은가? 지난해를 반추해 보면 서울을 기준으로 영하18도까지 떨어지기도 하는 곳이 다름아닌 한반도 하고도 우리가 사는 지역이다. 더구나 지구온난화라 일컬어지는 묘한 현상이 여름을 더욱 뜨겁게 달구고 있고, 겨울을 몹시도 차가워지게 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이라면 그 '학생다움'이라는 알 듯 모를 듯한 가치를 잠시 후순위로 내려놓은 채 무엇보다 아이들의 건강부터 염려하고 챙겨주어야 하는 게 맞지 않을까? 그게 그렇게도 어려운 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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