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편린들

문학은 문학일 뿐이다

새 날 2016. 9. 24. 1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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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보내고 멀리 

가을새와 작별하듯 

그대 떠나 보내고

돌아와 술잔 앞에앉으면 

눈물 나누나


.........


이제 우리 다시는 사랑으로

세상에 오지말기

그립던 말들도 묻어버리기

못다한 사랑!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이 계절에 너무도 잘 어울릴 법한 김광석의 노래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의 노랫말 일부이다. 이제 다시는 직접 들을 수 없는 천상의 소리라 그런지 이 노래를 부르는 그의 목소리는 더없이 처연하며, 노랫말로부터는 감성이 뚝뚝 묻어나온다. 그런데 이 아름답기 짝이없는 노래의 가사를 쓴 주인공 류근 시인이 최근 여성 혐오 논란에 휩싸였다. 


류근 시인은 2010년 이후 6년 만에 새 시집 '어떻게든 이별'을 내놓았는데, 이 시집을 두고 여혐 논란으로 불거진 것이다. 지난 15일 모 일간지에 누가 보아도 류근 시인임을 짐작케 하는 에피소드를 소재 삼아 한국 문단 전반에 팽배해 있는 여혐 분위기를 비판하는 칼럼이 게재됐다. 이후 SNS 등 인터넷 상에서는 류근 시인을 대표 여혐 시인으로 지목하며, 그를 향한 거센 비난이 일고 있다. 최근 사회 각계에 불고 있는 여혐 남혐 논란이 어느덧 문학계로 옮겨붙고 있는 양상이다.


ⓒKBS

칼럼은 그가 여자가 해준 밥을 먹고, 여자의 몸을 품평하고, 여자가 던진 원망의 눈길을 변명 삼아 다른 여자에게로 이동하는 방식의 낭만을 담고 있다며, 그의 시적 표현과 언어를 문제 삼고 나섰다. 아울러 낭만적인 서사 밑에는 늘 여자가 방석처럼 깔려 있다고도 했다. 그는 세계에서 자리가 없다고 한탄하지만, 여성을 착취하는 세계의 메커니즘에서 내려올 생각은 없어 보인다고 했다. 그 시절에 여자가 '밥 혹은 몸'이었듯이, 그의 시에서도 여자는 늘 '밥 혹은 몸'이라는 다소 격한 표현마저 서슴지 않고 있다. 

해당 칼럼을 쓴 이의 직업이 평론가가 맞다면, 작가와 작품에 대한 품평은 얼마든 가능한 일일 테다. 해당 작가의 작품을 열심히 맛보며 물고 뜯고 씹어본 뒤 나온 고뇌의 산물이라면, 그만큼 독자들에게도 의미있는 창작물이 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문학 등 예술 장르에서는 표현의 자유라는 화두가 무엇보다 중요하고 최대한 용인되어야 하듯이, 평론가라면 응당 그의 펜촉은 언제든 잉크가 촉촉히 묻혀진 채 작가와 작품을 향해 날카롭게 곤두세워져 있어야 한다. 그런 차원에서 보자면 이번 칼럼은 본연의 책무를 충실히 따르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문학 작품의 내용을 문제 삼거나 작가의 시적 표현을 직접적으로 지적하며 요즘 사회 전반에 일고 있는 여혐 논란과 연결지으려는 시도, 그리고 그러한 분위기에 편승하려는 움직임은 또 다른 논란으로 이어질 개연성이 다분하다. 그러니까 예술에 대한 표현의 자유를 최대한 인정해 주어야 하듯이 평론 또한 같은 맥락으로 받아들여져야 하는 건 분명 맞지만, 부러 논쟁을 키우려는 움직임은 우리가 경계해야 할 대상이라는 의미이다. 


물론 공공연하게, 혹은 암암리에 여성에게 가해지는 여혐 현상은 하루빨리 사라져야 할 사회적 악습이다. 아울러 우리 사회 전반에 독버섯처렴 퍼져있는 여혐 현상 일소라는 시급한 명제가, 문학계라고 하여 결코 예외일 수는 없다. 여혐 현상이 만연돼 있다면 이를 시정해야 하는 노력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그 방식이 문학 작품을 헤집어 놓은 채 작가의 표현 양식을 일일이 따져가며 응당 보장되어야 할 표현의 자유마저 뒤흔드는 방식이라면 결코 바람직스럽지 못하다. 이는 족쇄가 되어 작가들의 창작 의욕을 옭아매고, 독자들에게는 좋은 작가와 작품을 잃게 하는 우를 범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문학을 문학으로, 예술을 예술적 시각 그 자체로 바라보게 하는 소양과 혜안이 부족한 게 틀림없다. 비슷한 잘못을 무한 반복하기 일쑤이니 말이다. 우린 얼마 전 10살 초등학생이 쓴 동시가 실린 시집 '솔로 강아지'를 두고서 잔혹동시라며 마냥사냥을 벌였던 기억이 있다. 일부 잔혹한 시적 언어만을 부각시킨 채 10살 아이를 졸지에 패륜아로 둔갑시켰으나 사실 그 아이는 누구보다 감수성이 뛰어난 천재성을 지닌 감성 소녀였다. 

시에서 말하는 주체, 즉 화자는 작품에 따라 달라진다. 보통은 시인 자신이 되는 경우가 많으나 반드시 그렇다고 볼 수도 없다. 작가에 따라 얼마든 시점과 시각을 달리 둘 수 있는 까닭이다. 순전히 작가 마음 대로라는 얘기이다. 게다가 화자를 다른 사물에 빗대어 표현하기도 하거니와 통상적인 언어와는 전혀 다른 변화를 주어 묘사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특정 작품 속 표현 몇가지만으로 마치 그 시인의 정체성이자 그 자신인 양 몰아세우는 건 상당히 위험하다는 의미이다. 

ⓒKBS

다소 극단적인 사례가 될 수도 있겠으나, 영화 속에서 잔혹하게 연쇄살인을 저지른 범인 그리고 그 행위를 섬세하게 묘사한 감독이 이를 미화하였다고 하여, 아울러 늘 그러한 경향의 작품만을 만들거나 아예 시리즈물로 내놓는다고 하여 우리는 그를 사이코패스라며 손가락질하지는 않는다. 에로 영화 속에서는 흔히 여성이 남성의 성적 착취 대상이 되곤 하지만, 우리는 그렇다고 하여 해당 작품을 제작한 감독에게 여혐이라는 주홍글씨를 새기지는 않는다. 문학 뿐 아니라 모든 예술 작품 속에는 여러 이유로 우리가 평소 행할 수 없는 행위의 묘사를 통해 간접경험을 누릴 수 있게 하고, 일탈을 체험하게 하는 요소가 담겨 있다. 다른 어떤 영역보다 더욱 높은 단계의 표현의 자유가 주어져야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앞서 언급한 칼럼에서도 지적하고 나섰듯이, 우리가 정작 고쳐나가야 하는 건 일부 남성 문인들이 술자리에서 여성 문인들에게 술시중을 들게 하거나, 술에 취하면 성적인 욕을 퍼붓고, 젊은 여자 후배 문인들의 이름을 열거하며 성적 선호도 따위를 매기는 파렴치한 제안을 일삼는 등, 문학계 전반에 독버섯처럼 번져있는 여성을 대상으로 한 물리적인 성적 비하나 성추행, 성차별 등의 몹쓸 관행이 되어야 한다. 문학 작품 속 표현 자체를 문제 삼는 건 예술과는 거리가 아주 먼, 야만 행위에 다름아니다. 문학은 그저 문학일 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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