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편린들

신뢰를 잃은 사회는 희망이 없다

새 날 2016. 9. 26.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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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회가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느냐 혹은 그렇지 않느냐를 가늠하는 잣대에는 무엇이 있을까? 물론 다양한 형식과 양태가 존재할 것 같다. 하지만 내가 딱히 꼽고 싶은 건, 다름아닌 위기 국면에 직면했을 때의 대처 능력이다. 그러니까 어떤 사회이든 평온한 일상 속에서는 이면에 감춰진 온갖 문제 투성이들이 겉으로 드러날 리 만무하다. 위기 상황이 도래해서야 비로소 그 사회의 본질이 드러나곤 하기 때문이다. 세월호 참사를 겪으면서 우리의 본질 일부를 스스로 깨달을 수 있었듯 말이다. 


이제껏 겪어 보지 못했던 수준의 지진을 최근 잇따라 경험하면서 우리 사회의 취약하기 이를 데 없는 재난 대처 능력 등 평소 접하기 어려웠던 민낯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말았다. 세월호 참사와 메르스 등 수많은 재난 상황을 경험하거나 극복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위기와 관련한 대응 능력은 서투르기 짝이없다. 단순히 서투른 수준에서 그치면 그나마 다행이다. 잘못된 부분이 있다면 이를 고쳐 다음번 비슷한 상황에서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면 그만일 테니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가정은 국가와 국민 간에 기본적인 신뢰관계가 형성되어 있다는 전제 하에서의 얘기일 뿐이다.  



최근 국민들의 정부를 향한 시선은 따갑다 못해 원망의 눈빛이 한가득 담겨 있는 모양새다. 지금처럼 근본적인 신뢰가 무너진 상황에서는 백약이 무효일 수밖에 없다. 신뢰라는 명제는 아주 사소한 것에서부터 매우 중차대한 사안까지, 우리의 삶을 지탱하는 가장 근간이 되는 요소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기본적인 신뢰관계가 형성되어 있지 않다면, 작게는 가정에서부터 조금 크게는 회사, 보다 크게는 국가라는 공동체까지, 사회 전체가 삐걱거릴 수밖에 없다. 


부모 자식 간에는 서로의 역할과 관련하여 마땅히 이러할 것이라는 암묵적인 신뢰관계가 형성되어 있다. 이러한 신뢰는 가정 내의 자연스러운 질서를 형성한다. 회사 역시 마찬가지다. 노동자가 해당 회사에 적을 둔 채 열심히 일할 수 있는 것은 회사가 법규를 준수하며 노동자의 권리를 가능한 보장해 준다는 기본적인 믿음이 존재하기 때문일 테다. 회사 입장도 결코 다르지 않다. 어떤 회사가 한 사람의 직원을 채용한다는 건 그가 마땅히 따라야 할 사규나 회사와 맺은 근로계약을 성실히 이행할 확률이 높기 때문일 테다. 



그동안의 축적된 경험이 이러한 신뢰관계를 자연스럽게 구축해 온 셈이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이나 집단이 충분히 예측 가능한 행동을 취할 것이며, 그로부터 벗어날 가능성이 적다는 확률과 판단이 이러한 결과를 가능케 하는 것이다. 즉, 신뢰란 일관성과 관련한 사안이다. 만에 하나 이러한 일관성의 규칙이 깨져버린다면, 그로 인해 치러야 할 비용과 대가는 어마어마하지 않을 수 없다. 


국가라고 하여 다를까? 죄를 저지른 사람이라면 그가 돈이 많든 적든, 혹은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이든 그렇지 않든 간에 관계 없이 마땅히 죗값에 준하는 처벌을 받아야 한다. 국민이 한 표 행사를 통해 위정자를 뽑았다는 건 그가 국민 대신 국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을 잘 처리해 줄 것이라는 신뢰관계가 형성되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일 테다. 


하지만 결과는 어떠한가? 시위 도중 우리 국민이 국가의 공권력에 의해 목숨을 잃어도 사과 한 마디 없다. 국가 정책에 반대할 수 있는 기본적인 권리가 누구에게나 보장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외려 무조건 가만히 있으라고 만 한다. 애초 공직자로서 자격이 안 되는 사람만큼은 자리에 앉히지 않을 것이라 굳게 믿었건만, 임명을 시도하고, 심지어 그에 반대하고 있는 입법부와 정면대결을 펼치는 무리수를 두면서까지 사사로운 감정과 고집에 사로잡힌 채 국정을 운영하려 한다. 



국민들은 마땅히 이러할 것이라 생각하고 판단하며 그에게 표를 몰아 주었건만, 예측과는 전혀 딴판으로 돌아가고 있는 셈이다. 국민들은 상식이 사라진 정부의 정책과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켜주지 않는 비정상적인 모습을 바라보며 그나마 남아 있던 일말의 신뢰마저 완전히 놓아버리고 만다. 알다시피 우리나라의 사법체계와 정부에 대한 신뢰도는 OECD 최하 수준이다. 지난해 발표된 통계 결과가 이를 입증한다. 하지만 우리가 직접 겪고 있는 체감 신뢰는 이보다 훨씬 아래쪽을 향해 지금도 움직이고 있는 형국이다.


신뢰란 마땅히 그러할 것이라는, 일종의 믿음이다. 이 믿음 관계가 일그러지는 순간 모든 건 뒤죽박죽이 돼버리고 만다. 대한민국을 헬조선이라 부르는 이면에는, 물론 경제적인 어려움이 한 몫 하고 있겠지만, 실상은 이렇듯 무너진 상식 기반의 신념과 신뢰에서 비롯된 측면이 강하다. 각자도생이라는 용어의 유행은 세월호 참사와 메르스를 거치며 무능함의 극치를 보여 주었던 정부로부터 희망을 접은 국민들이 각자의 생명은 스스로가 알아서 챙겨야 한다는 믿음으로부터 비롯된 경향이 크다. 국가 지도자의 비합리적인 신념체계는 결국 국가와 국민 사이에 응당 형성되어 있어야 할 신뢰마저 무너뜨리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신뢰 붕괴는 크고 작은 사회적 비용을 양산하기 마련이다. 신뢰를 잃은 사회로부터는 절대로 희망을 찾을 수 없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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