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저냥

물러가는 장마가 아쉬운 이유

새 날 2016. 7. 30. 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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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영화 관람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던 길이었다. 야심한 시각이었는데 하늘에서는 느닷없이 굵은 빗줄기가 떨어지고 있었다. 미처 우산을 챙기지 못한 우리는 비를 당장 피할 수 있는 인근 상가로 일단 몸을 피했다. 


'이상한 일이다 오늘 비 온다는 예보가 없었는데..' 


가뜩이나 없는 시간 쪼개 어렵사리 관람한 영화였거늘, 몸이 천근만근인 이유 때문인지 아니면 정말로 영화 내용이 지루했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두 시간 내내 꾸벅꾸벅 조느라 여념이 없었다. 게다가 비까지 내리니 여간 낭패가 아닐 수 없다. 웬만한 영화는 집중해서 보는 편인 까닭에 이러한 결과는 나조차 당황스러웠다. 그만큼 근래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혹사 당하고 있다는 의미로 다가온다. 다행히 시간이 조금 지나니 굵었던 빗줄기가 점차 옅어지고 있었다. 이 정도면 비를 맞고 가더라도 큰 지장이 없을 것 같았다.



아주 어릴적, 그러니까 중고등학교 시절, 비가 올 때면 우산을 쓰지 않은 채 그냥 이를 맞으며 터벅터벅 걷곤 했던 기억이 있다. 귀찮다는 게 표면적인 이유였으나 진짜 속내는 왠지 비를 맞으며 걷는 일을 나름 즐겨했던 것 같다. 그로부터 한 세대 하고도 수년이 훌쩍 지나 어느덧 우리집 막내 녀석이 그 또래가 됐다. 그런데 하는 꼴이 영락 없는 내 짝이다. 비가 뻔히 올 것을 알면서도 우산을 가져가지 않은 채 맞고 다닌다. 왜 그러느냐고 물어보면 귀찮아서라는 매우 퉁명스런 답변만 돌아온다. 혹시 내가 지닌 유전적 형질이 녀석에게 고스란히 심어진 탓이 아닐까?


어젯밤에는 아내에게 좋은 일이 있어 간단하게 축하주 한 잔을 했다. 역시나 야심한 시각 빗줄기가 후두둑 하며 떨어지던 참이다. 집 주변 호프집에 둘러앉아 모처럼 호프 한 잔씩을 들고 근래 하고 있는 일들에 대해 서로 용기를 북돋으며 위안을 건네던 찰나, 빗줄기가 굵어지더니 거의 폭우 수준으로 변모하고 있었다. 떠들썩한 호프집은 빈 테이블이 없을 정도로 손님들로 가득 들어찼다. 저마다 함박웃음꽃을 피우며 이야기 삼매경에 빠져 있는 모양새다. 무언가 굉장히 정겨우며 운치 있는 광경이 아닐 수 없다. 돌아오는 길에 아내와 더불어 폭우를 함께 즐겼다(?). 시원하기도 했지만 내겐 빗속을 거니는 일이 무엇보다 즐거웠다.



아침, 아니 새벽? 빗소리에 놀라 그만 일찍 눈을 뜨고 말았다. 엄청난 빗줄기가 지상으로 내리꽂히고 있었다. 일기예보를 보아 하니 오늘 내리는 비를 끝으로 장마전선은 자신의 소임을 마치고 물러난다고 한다. 그러니까 앞으로 본격적인 더위를 알리고 있는 셈이다. 이번 장마는 유난히 기억에 남는다. 내생적인 이유 때문이 아니다. 기상청 때문이다. 기상청의 일기예보가 어긋나 나의 일정마저 뒤틀리게 된 건 불과 며칠 전 경험했던 일이기도 하다. 공기의 흐름이 워낙 가변적이라, 특히 장마철 같은 때일수록 예보를 정확히 할 수 없다는 기상청의 변명은 귀에 인이 박히도록 들어온 뻔한 레파토리다. 무슨 영문 때문인지는 몰라도 기상 예측 장비 가격이 올라가고 첨단을 걸을수록 되레 예보가 더욱 어긋나는 것만 같다.


어쨌든 장마가 물러간다고 하니 왠지 모를 아쉬움이 짙게 남는다. 요즘 같은 계절에 내리는 비로부터는 독특한 정취와 느낌을 얻을 수가 있었는데 말이다. 문득 떠오르는 영화 한 편이 있다. 물론 '비'를 통해 떠오를 만한 심상이 반드시 낭만 따위의 평화로운 분위기만 있는 것이 아닌 터라 최근 개봉한 '곡성'을 떠올리는 분들도 더러 계시리라 짐작된다. 음울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데 있어 요즘 같은 계절에 내리는 장대비는 더없이 훌륭한 소품이 아닐 수 없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내겐 '곡성' 속 비가 연출하는 분위기보다는 사실 애니메이션 '언어의 정원' 속 그것이 훨씬 더 끌린다. 



주인공인 다카오는 내가 유독 비를 맞기 좋아하던 시절, 그러니까 내 청소년기 나이대와 비슷한 또래의 학생이다. 왠지 우리집 막내 녀석과 비슷한 나이일 듯한 느낌이다. 다카오 역시 나 이상으로 비를 무척 좋아한다. 어느 수준이냐면 하늘에서 내리는 비로부터 늘 동경해 마지 않던 하늘의 속살 냄새를 느낄 수 있어 좋다고 말할 정도다. 비가 내릴 때면 땅으로부터 올라오는 흙냄새가 좋다고 여기던 나보다 분명 한 차원 높은 수준이 아닐 수 없다. 



요즘처럼 비가 내리는 날이면 학교로 향하던 발걸음을 돌려 자신만의 아지트라 할 수 있는 도심 인근의 공원을 찾을 만큼 소년은 비에 흠뻑 도취돼 있다. 공원에서 만난 띠 동갑의 유키노와 닿을듯 말듯 이어지는 아련한 사랑이 땅으로 내리퍼붓는 비를 닮아 더욱 애틋한 감성으로 다가오는 측면도 있으나, 그보다는 흡사 투명한 수채화처럼 비 내리는 장면과 맑은 빗소리 그리고 배경음악으로 깔리는 단촐한 피아노 소리가 어우러지며 만들어내는 묘한 심상이 내겐 더 좋았던 것 같다.



때문에 요즘처럼 비가 내릴 때면 나의 머리와 마음 속에는 더없이 맑디 맑은 '언어의 정원' 속 감성과 분위기가 늘 자리잡곤 한다. 비록 계속되는 오보 때문에 구라청이라는 비아냥을 야기하고 있기는 하지만, 비록 오보이더라도 근래 비가 내릴 것이라는 예보를 보거나 듣고 있노라면 부지불식간에 '언어의 정원' 속 예의 그 투명한 정취와 감성이 되살아나곤 하던 터였기에, 장마가 물러난 이상 당분간 이와 같은 감성을 느낄 수가 없을 것 같아 자신의 소임을 마치고 북태평양고기압에 자리를 내주고 떠나가는 장마전선이 영 아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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