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저냥

효도에도 계약서가 필요한 씁쓸한 세상

새 날 2016. 7. 24. 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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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대법원은 2층짜리 집을 물려받은 뒤 부모를 홀대한 불효자식에게 증여 받은 집을 반환하라는 판결을 내린 바 있다. 이른바 '효도 계약' 판결이라 불리는 사건이다. 이는 어느새 뜨거운 감자가 됐다. 우리 사회의 많은 부분을 변화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고무된 몇몇 국회의원들은 '불효자 방지법'을 발의시켰다. 하지만 해당 법안은 19대 국회에서 계류된 채 발이 묶였고, 결국 지난 4월13일 치러진 20대 총선에서 후보로 나선 이들은 여야 가릴 것 없이 60세 이상 유권자의 표심을 잡기 위해 '불효자 방지법'을 추진하겠다고 나선 상황이다. 실제로 입법으로 이어지게 될지 초미의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뿐만 아니다. 이후 이른바 '효도 계약서'를 쓰겠다는 부모들이 부쩍 늘고 있다는 소식이다. 그러니까 '효도 계약서'란 부모가 재산을 물려줄 테니 자식인 너희들도 최소한 이 정도는 따라주어야 한다는 조건 따위를 명시한 계약서를 일컫는다. 사실 천륜지간이라고 하는 부모 자식 사이임에도, 하필 다른 것도 아닌 효도를 보장하라는 계약서를 쓴다는 건 여간 뒷맛이 개운치 않은 현상이 아닐 수 없다. 


YTN 방송화면 캡쳐


근래엔 효도 계약서를 작성할 때 주의해야 할 사항들마저 널리 회자되고 있다. 사뭇 달라진 세태가 아닐 수 없다. 언론에 소개된 내용을 살펴보면 계약서에 담길 조건은 최대한 구체적인 게 좋다고 한다. 막연한 구두 약속만으로는 지켜지지 않을 가능성이 농후한 만큼, 부양의 의무 정도나 재산반환 조건 등을 구체적으로 명시한 계약서를 통해 부모의 권리를 제대로 보장 받으라는 얘기다. 


가령 '자주 방문해야 한다'와 같은 애매모호한 표현보다는 '매달 방문' 또는 '연 10회 이상 방문' 등과 같이 구체적인 방식으로 기록해 두어야 논란의 여지를 잠재울 수 있다는 의미다. 용돈 역시 마찬가지다. '매월 100만 원'처럼 정확한 금액을 표기해 놓아야 한단다. 그밖에 나중에 장례절차를 정해진 대로 해야 한다거나 생일에는 저녁마다 밥을 같이 먹어야 한다는 등의 상당히 세세한 항목까지 다뤄지고 있다. 마지막으로 부모가 제시한 조건들을 이행하지 않을 때엔 증여 재산을 반환한다는 문구를 반드시 삽입한 뒤 자녀의 서명을 받아야 한다는, 깨알 같은 주의사항도 잊지 않고 있다.


그러니까 자식으로서의 부모에 대한 최소한의 도리를 부모의 재산과 엮어 조건을 내거는 방식이 다름아닌 '효도 계약서'인 셈이다. 부모 자식 간이라면 마땅히 따르고 행해져야 할 도덕적인 관습들이 금전적이거나 의무가 강제된 법적 조건에 의해 거래된다는 점에서 무언가 이물감이 느껴질 법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이에 대한 대중들의 거부감이 상당히 낮은 것으로 알려져 더욱 놀라울 따름이다. 



얼마 전 여론조사기관인 리얼미터가 전국 19세 이상 성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효도 계약'에 대해 '필요하다'는 응답이 77.3%, '필요없다'는 응답이 14.7%로 나타났다. 성인 10명 중 7명 이상이 이의 필요성에 공감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불효자 방지법'에 대한 설문에서도 '입법화가 필요하다'는 응답이 67.6%로 나타나 반대의견 22.6%보다 압도적이었다. 


이러한 결과가 나오게 된 주요 배경에는 효에 대한 전통적 가치관이 점차 옅어지며 자칫 붕괴의 조짐마저 읽히는 시대적 조류가 한 몫 단단히하고 있으리라 짐작된다. 물론 미증유의 장기 경기 침체로 인한 경제적 어려움 또한 천륜지간의 관계를 해치는 또 다른 요소로 작용할 법하지만 말이다. 어려운 처지의 부모들이 자식을 상대로 내는 ‘부양료 지급 청구 소송’이 2003년 127건에서 2013년 250건으로 2배 이상 늘어난 것만으로도 그러한 경향성을 확인시켜 준다.


YTN 방송화면 캡쳐


물론 제아무리 부모와 자식 간이라고 하더라도 기왕지사 서로 조건을 내걸어 의무를 다해야 한다면, 확실한 방식이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백번은 낫다. 시대적 조류가 지속적으로 변해왔듯 그러한 측면에서 보자면 '효도 계약서'라는 형식은 어쩌면 필요악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효도가 법의 잣대에 의해 강제되어야 한다는 사실은 여전히 낯설은 데다 거부감마저 드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자식이라면 응당 지켜야 할 인간의 도리와 양심에 바탕을 두고 있는 자율적 규범이 다름아닌 '효'라는 정서 아닐까 싶기 때문이다. 삶의 가치가 물질적 요소로 더욱 기울어가며 전통적 가치관마저 점차 희석되다 보니 나타나는 결과물이라 판단된다. 


그나마 자식이 노부모를 자주 찾지 않고 부양하지 않는 등 부양 의무를 소홀히 할 경우 법적 처벌을 받게 되는 중국보다는 여건이 조금은 나은 편이니 이를 위안 삼아야 하는 걸까? 하지만 고령사회로 보다 깊숙이 발을 딛고 있는 우리 역시 중국과 판박이가 될 날이 얼마 남지 않은 터라 결코 남의 일로 다가오지 않는다. 강호의 도리는 도대체 모두 어디로 간 것인지, 효도 등의 개념이나 정서 따위는 법에 맡겨지기보다 예절과 도덕만으로도 충분히 지켜지고 보장 받을 수 있는 지극히 상식적인 사회가 더욱 그리워지는 건 비단 나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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