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르의 전설

그렇게 가족이 되어간다

새 날 2016. 2. 28. 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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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르와의 첫 만남은 서울대 부근에 위치한 어느 빌라에서였다. 태어난 지 4개월이 되었다는 말을 듣고 난 호기롭게도 녀석을 박스에 담아 대중교통을 이용해 데리고 오려던 참이었다. 하지만 당시 미르의 견주는 개의 덩치가 만만치 않기에 승용차를 이용하는 게 나을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후에 미르를 직접 접해 보니 이건 이미 강아지의 덩치가 아니었다. 성견이 된 지금과 비교해도 그다지 차이가 나지 않을 정도로 어마어마했다. 박스에 넣는 건 고사하고 아예 들고 갈 처지가 못 되었다.

 

녀석은 천성적으로 사람을 좋아하는 듯 보였다. 하지만 반가움의 내색과는 별개로 낯선 나를 보더니 두려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흡사 수줍은 새색시 마냥 어쩔 줄 몰라해 하던 녀석의 당시 모습이 아직도 눈에 어른거린다. 미르는 우리집 가족회의를 거쳐 입양해 온 최초의 반려견이다. 이름도 같은 절차를 통해 지어주었다. 미르 얘기가 나왔으니 이참에 반려견과 관련한 과거의 흐릿한 기억 하나를 꺼내 볼까 한다.

 

어린 시절 우리집을 거쳐 간 반려견의 수는 꽤 많다. 스피츠로부터 치와와, 세퍼트, 믹스견까지 그 종류도 무척 다양하다. 이름도 한결 같다. 성별 같은 건 전혀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다. 무조건 '케리'라 불렸다. 왜 그랬는지는 나도 모른다. 주로 어머님이 입양해 오셨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대부분의 '케리'들은 길게는 수년, 짧게는 몇개월 동안 길러지다가 어느날 감쪽 같이 어디론가로 사라지곤 했던 것 같다.

 

그럴 때마다 난 개가 어디 갔느냐고 여쭈었고, 아는 사람에게 주었노라는 어머니의 답변이 돌아오곤 했다. 물론 실제로 지인에게 재차 입양되는 경우를 몇차례 경험하긴 했다. 하지만 그보다는 개가 울면 재수가 없다는 등의 말을 입밖으로 자주 꺼내곤 하셨던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남아있는데, 아마도 이러한 속설을 믿고선 우는 습성이 있던 개를 팔아버린 경우가 더 많지 않았을까 싶다. 간혹 어떤 녀석들은 집을 뛰쳐 나갔다가 며칠 후 쥐약을 먹고선 죽을 때가 되어서야 돌아오는 경우도 왕왕 있었다. 



그나마 어머니는 개를 직접 입양해 오는 등 반려견에 대한 애정이라도 갖고 계셨으나 아버지의 성향은 전혀 그렇지가 못했다. 술을 드신 날이면 여지 없이 개에게 화풀이를 하곤 하셨다. 개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나를 비롯한 가족들이 말리곤 하였으나 전혀 소용이 없었다. 덕분에 모든 '케리'는 아버지의 목소리를 듣거나 냄새 만으로도 벌써부터 술에 취했는지의 여부를 알아차리고 퇴근할 무렵이면 안절부절 못한 채 몸을 숨기느라 바빴다. 돌이켜 보니 과거 우리집은 반려견을 키워선 절대로 안 되는 환경이었다.

 

미르와의 인연은 올해로 벌써 7년차다. 불행히도 과거 우리집을 거쳐 갔던 수많은 '케리' 중 지금의 미르 만큼 오랜 시간을 함께했던 녀석은 없었다. 미르는 내가 직접 입양해 온 덕분이기도 하겠으나,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과거 어릴적 나의 기억속 모든 '케리'와는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아버지가 과거 하찮은 존재로 여기며 못살게 굴었던 수많은 케리들처럼 미르 역시 비록 인간보다 월등히 못난 하등동물에 불과하나, 7년 동안 동고동락하는 사이 어느덧 가족의 일원이 돼 있었기 때문이다.

 

 

요즘 미르의 귀가 아프다. 치료를 했음에도 재발이 잦다. 덕분에 소독해 주는 게 일상 중 하나가 됐다. 녀석의 대표 성향 중 하나인 엄살은 여전하다. 단순히 귓속에 면봉을 집어넣는 일만으로도 동네가 떠나갈 듯 울며 불며 난리법석을 떨곤 하는 녀석이다. 어디 아프지는 않은지, 아프다면 어떻게 치료를 해 주어야 하는지 등을 고민해야 하는 건 자식을 키울 때와 별반 다르지 않다. 녀석이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때면 이보다 만족스럽고 기쁜 경우도 드물다.

 

처음 입양해 올 때까지만 해도 미처 몰랐거나 생각지 못 했던 부분들을 수없이 경험한다. 다행스러운 건 녀석에 대한 책임감이 날로 커져간다는 사실이다. 아울러 과거 우리집을 거쳐간 수많았던 '케리'들에게 비록 내가 직접 행한 건 아니라 해도 얼마나 못할 짓을 많이 한 것인지 미르 덕분에 비로소 깨닫게 된다. 서로 다른 종류의 동물 사이에서 이렇듯 교감을 이루며 마치 가족처럼 함께할 수 있다는 사실, 생각해 보면 참으로 놀라우면서도 고마운 일이다. 언젠가 미르가 집에서 탈출하여 며칠 동안 자리를 비운 적이 있었는데, 당시 주인은 온 데 간 데 없이 빈 그릇만 덩그러니 놓여 있는 모습을 보며 가슴 한켠이 몹시 아팠던 기억이 있다.

 

미르는 어느덧 우리 가족의 일원이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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