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저냥

산으로 가고 있는 어느 선남선녀의 연애담

새 날 2015. 12. 25. 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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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절이다. 기분 좋은 날이다. 왜냐하면 하루를 쉴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이번 성탄절은 토요일과 일요일까지 이어지며 사흘을 내리 쉴 수 있게 해준다는 사실 때문에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하다. 물론 그렇다고 하여 내게 딱히 계획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그뿐이다. 과거엔 성탄절 하면 괜시리 마음이 들뜨는 무언가가 있었던 게 사실이다. 어릴적엔 산타 할아버지로부터 선물을 받을 수 있다는 점 때문에 그랬던 것 같고, 성인이 된 이후에는 친구들과의 즐거운 시간이나 연인과의 데이트로 소일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설레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정확히 언제부터인가 모르지만 성탄절의 들뜬 마음은 온 데 간 데 없고, 오로지 빨간날이라는 사실만이 날 흡족케 한다.

 

이와 관련하여 한 결혼정보회사가 흥미로운 설문 결과를 내놓았다. '가연'이라는 회사인데, 최근 20, 30대 미혼남녀를 대상으로 설문한 결과 크리스마스에 무감각해지는 나이가 평균 31.6세라는 결과를 도출해낸 것이다. 그 나이쯤 되면 늘 성탄절을 함께 즐겨 오던 솔로부대원들이 저마다 제 짝이 생겨 대열로부터 이탈하거나 아예 결혼을 하는 바람에 함께 놀아줄 사람이 사라지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아울러 한창 사회생활에 치이는 시기, 현실적인 문제와 씨름하는 사이 어느덧 성탄절이라는 막연한 환상 따위가 점차 현실의 그늘에 가리어지는 현상일 수도 있겠다.

 

 

어쨌거나 선남선녀에게 있어 성탄절의 이미지는 여전히 연인과의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날이 대세인 것만은 예나 지금이나 큰 변함이 없는 것 같다. 그런데 근래 모 커뮤니티를 들락거리다 재미있는 현상 하나를 발견하게 된다. 한 남성이 낯 선 여성에게서 대시를 받았다는 얘기인데 - 미혼의 젊은 남성이라면 누구나 꿈꿀 만 한 판타지다 - 젊은 청춘남녀에게 있어 이러한 일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데다 아주 간혹 벌어질 수 있는 사안이기도 하기에 그다지 특별할 것도 없을 것 같지만, 글 아래로 줄줄이 달린 댓글에서는 의외의 현상이 벌어지고 있었다.

 

요는 이렇다. 한 남성이 술집에서 술을 마시다 다른 테이블에 앉아 있던 20세의 여성이 호감을 보여 와 서로 연락을 주고 받는 사이가 되었다는 건데, 축하한다는 댓글보다는 그녀가 속칭 '바 알바'일지 모른다거나 장기 밀매를 노린 접근일 수도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는 댓글이 깨알 같이 달리고 있었다. 물론 대다수는 장난으로 읽힌다. 전혀 모르던 낯 선 이성으로부터 대시를 받는다는 건 판타지의 일종이기에 타인의 연애담에 배가 아픈 탓일 테다. 다른 날도 아닌 성탄절마저 외롭게 보내야 할 솔로부대원들의 입장에서는 한 마디로 눈꼴신 셈이다.



그러나 일견 장난 같아 보이는 댓글들이기는 하나, 다른 관점으로 보자면 결코 장난만으로 치부할 수 없는 면모도 엿보인다. 물론 술을 잔뜩 먹여 뻗게 만든 후 장기를 빼간다는 내용은 이른바 도시괴담 류에 해당되기에 신빙성이 떨어지는 소재다. 하지만 그와는 달리 실제 경험담을 상세하게 올린 경우를 볼 수가 있는데, 바 알바 여성이 연애를 가장한 채 접근, 며칠 뒤 남성과 만난 뒤 술집으로 안내하여 비싼 술을 잔뜩 주문하고 수백만원을 뒤집어 씌운다는 그런 류의 이야기 말이다. 다수의 사람들이 비슷한 내용의 댓글을 단 걸 보면 실제로 같은 경험을 한 이들이 생각보다 많은 듯싶다. 우연히 성사된 연애를 가장한 일종의 사기극이 극성을 부리고 있는 셈이다.

 

 

선남선녀의 연애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자 권장해야 할 덕목임엔 틀림없다. 그러나 솔로부대원이라면 누구나 바라마지 않던 판타지와도 같은 타인의 연애담을 접하며, 우린 언젠가부터 축하한다거나 이쁜 연애하라는 덕담보다는 연애를 가장한 치졸한 상술이나 끔찍한 도시괴담 류의 현실을 걱정해 주어야 하는 시대가 돼 버렸다. 물론 이런 사례가 아니더라도 사람들의 곤란한 처지나 약점을 꼬드겨 사기 행각을 일삼는 치들이 사회 곳곳에 넘쳐나는 세상이기도 하다. 보이스피싱이 여전히 활개를 치고 있는 것만으로도 세상은 이미 순수함을 잃은 지 오래다.

 

때문에 자신이 아닌 타인의 연애 성공담에 배가 아파 장난 삼아 부러 이상한 댓글을 다는 경우는 되레 순수함으로 다가온다. 그만큼 우리가 사는 세상이 순수하지 못하다는 방증일 테다. 어느덧 본질을 벗어나 산으로 가고 있는 듯한 선남선녀의 연애담, 그런데 실제 경험담이 난무하고 있고 정황상 결코 허황된 얘기가 아닌 것으로 읽히는 데다, 순수해야 할 연애마저 상술이나 사기 행각으로 이용하려는 치들이 부쩍 늘어나고 있는 만큼 우리 사회가 혼탁해졌다는 의미로 다가오기에 더없이 씁쓸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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