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접 경험의 즐거움

<특종 : 량첸 살인기> 언론은 진실한가

새 날 2015. 10. 22. 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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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 방송사의 보도국 기자로 재직 중인 허무혁(조정석)의 삶은 안팎으로 고달프다. 아내 수진(이하나)과는 별거 중인 데다 곧 이혼을 앞두고 있는 상황이고, 업계에서 금기시되어온 광고주의 심기를 겁도 없이 제대로 건드린 탓에 직장에서는 해고 통보까지 받아놓은 상태다. 마냥 의기소침해 있는 무혁은 아내를 찾아 다시금 결합하자고 간청해보지만, 그녀는 이미 그로부터 마음이 떠난 지 한참인 듯 찬 바람만 쌩하다.

 

그러던 어느 날이다. 회사로 의문의 전화 한 통화가 걸려온다. 상대방은 여성으로 판단되는데, 왠지 어눌한 발음으로 보아 내국인은 아닌 듯싶다. 당시엔 연쇄살인사건으로 인해 전국이 떠들썩하던 시점이다. 때마침 걸려온 전화는 연쇄살인사건의 진범을 자신이 알고 있노라는 제보자의 그것이었다. 물론 무혁 또한 처음엔 전화 내용에 대해 반신반의한 채 심드렁하기만 했다. 그동안 제보한답시고 걸려온 전화의 대부분은 엉터리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차피 직장도 그만두어야 할 처지에 놓인 그다. 밑져야 본전이라는 자포자기 심정으로 그녀가 알려준 곳을 향해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보는데.. 

 

 

그는 제보자를 만나 살인범의 은닉처로 추정되는 주택 내부에 잠입한다. 물론 제보자로부터 사전에 사람이 없다는 것을 확인 받은 뒤다. 내부엔 각종 흉기들이 즐비했고 핏자국 등 온통 으스스한 분위기다. 그때다. 범인이 연속 살인을 저지를 때의 감정과 느낌을 생생하게 묘사해놓은 것으로 추정되는 노란색 쪽지를 발견한 무혁, 이곳이 살인범의 거주지라는 결정적인 물증임을 직감한다. 해당 쪽지를 챙긴 뒤 서둘러 그곳을 빠져나온 무혁은 일련의 과정들을 보도국에 알린다. 보도국장인 백국장(이미숙)은 경찰도 잡지 못해 허둥거리고 있는, 최근 가장 핫한 이슈인 연쇄살인사건의 범인과 관련한 첩보를 자신들이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흥분한다. 이윽고 상당한 사회적 파장을 불러올 만한 특종감이라 직감한 그녀는 생방송 보도를 결정하는데...,

 

부제인 '량첸 살인기'는 중국에서 발간된 소설 제목이자 이 영화의 모티브다. 언론에 보도된 내용을 빌리자면 이 소설은 1938년 장백산 문예상을 수상한 중국의 문호 왕시우잉의 작품이다. 연쇄살인마 량첸 대령의 일인칭 시점으로 진행되는 자전적 형식의 소설인데, 무차별적으로 살인을 저지르는 주인공의 심리를 가감 없이 담아내 이를 모방한 범죄가 잇따라 발생하게 되고, 심지어 량첸 대령을 추종하는 세력이 등장함에 따라 중국 정부가 소설 절판과 함께 전량 회수를 결정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해당 소설은 국내에서도 출간된 것으로 알려졌으나 현재는 구할 수 없는 처지인 데다 일부 수집가들 사이에서 뒷거래되고 있다거나 발췌본이 입수됐다는 소문만이 파다할 뿐 실제로 해당 소설이 존재했는지의 여부조차 베일에 가려진 상황이다. 무혁이 살인범의 거처에서 몰래 훔쳐와 연쇄살인의 결정적인 물증 역할을 하게 되는 노란색 쪽지에 적힌 글 내용은 다름아닌 이 소설 '랸쳉 살인기'의 한 구절이다. 영화속 어이없는 해프닝의 시작은 다름아닌 이로부터 기인한다.

 

제법 무거운 주제와는 달리 영화는 시종일관 황당함의 연속이다. 전형적인 기자 이미지보다 다소 친근한 데다 얼빠지고 만만한 모습으로 그려진 덕분에 무혁이 벌이는 일들은 우스꽝스러움 일변도로 묘사돼 있다. 하지만 전후사정을 모두 이해하고 나면 매우 씁쓸한 광경이 아닐 수 없다. 무혁이 말도 되지 않는 우연한 정황들을 진실이라 믿은 채 이를 근거로 보도국에 취재한 내용을 건네면, 보도국은 그에 대한 실체적 진실을 확인하거나 합리적인 의심 따위는 철저히 외면한 채 오로지 시청률을 끌어올릴 요량으로 취재 내용을 그럴 듯하게 포장한 뒤 가장 극적인 방식을 빌려 세상에 알린다.

 

 

시청률 지상주의에 중독되기라도 한듯 한 번 시작한 폭주는 절대로 스스로 멈추는 일이란 없다. 대중의 관심이 폭발하여 방송사의 인터넷 서버가 다운되는 현상과 실시간 시청률이 급등하는 상황을 접하며 방송사 전체는 온통 축제 분위기에 휩싸인다. 무혁의 위상은 이런 상황이 거듭됨과 동시에 더욱 치솟는 기현상마저 빚어진다. 관객들이 보기에는 엉성하고 온통 말도 되지 않는 사건 사고의 연속이지만, 감독은 오히려 이를 즐기기라도 하듯 냉소적이며 아이러니한 상황의 일관된 연출로 영화 종료 시점까지 꿋꿋하게 밀어붙인다.

 

우린 영화 중간 중간 어이없는 내용과 설정 때문에 헛웃음을 보이다가도 결말 부분에 이르러 마침내 감독의 의도가 드러나면서 급 우울해진다. 그렇다. 이 작품은 황당한 사건과 풍자를 통해 관객의 웃음을 유발하곤 하지만 그 본질은 음울하고 씁쓸하기 짝이 없는, 일종의 블랙 코미디 장르의 영화다. 언론계의 은밀한 관행 따위가 엿보이기도 한다. 영화는 돈줄인 광고주와 언론사의 관계가 단순히 우리가 피상적으로 알고 있던 사실보다 훨씬 심각한 수준일 수도 있다는 점을 내비친다. 아울러 공익과 취재원 보호라는 상반된 개념 사이에서 벌이는 언론사의 아슬아슬한 외줄타기는 짐짓 위태로워 보이기까지 한다.

 

이 영화를 관람하다 보면 문득 다른 영화 한 편이 떠오른다. 비슷한 주제 의식을 담고 있는 '나이트크롤러'다. 이 영화에서는 특종에 눈이 먼 기자가 눈속임 등의 조작과 거짓말 그리고 살인 방조 행위마저 서슴지 않으며 사건 현장을 카메라에 담는, 보기에 다소 거북한 내용과 장면이 주를 이룬다. 즉 철저하게 사실적인 묘사를 통해 사회적 공기로서의 책무를 망각한 채 대중의 인기에 영합하고 선정성을 무기로 내세워 시청률 경쟁을 일삼는 언론의 보도 관행을 날카롭게 꼬집고 있다. 유머 코드와 황당한 사건을 내세워 관객의 웃음을 통해 주제의식을 드러낸 '특종 량첸살인기'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이다.

 

 

허무혁 배역의 조정석은 자신의 캐릭터에 제대로 몰입한 듯 그만이 지닌 색깔과 매력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경찰인 오반장 배역의 배성우는 시종일관 방송사와 대립각을 세우며 긴장감을 늦출 수 없게 하는 감초 역할을 톡톡히 한다. 겉으로는 날카로운  인상을 드러내며 경찰관으로서의 소임에 충실한 듯싶지만, 알고 보면 영 맹탕인 캐릭터다. 다작 활동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의 출연은 어떤 작품에서든 즐겁기만 하다. 이미숙의 배역은 다소 의외로 다가온다. 방송사 보도국장 역할인데, 나이트크롤러에서의 비슷한 캐릭터로 출연했던 르네 루소에 비하면 무언가 중량감이 떨어지는 느낌이다. 물론 그녀의 연기력이 나쁘다기보다 왠지 이러한 캐릭터와는 궁합이 잘 맞지 않아 보인다는 뜻이다.

 

이 영화만의 특징이라면, 다소 심각한 주제 의식일 수도 있는 소재를 '량첸 살인기'라는 독특한 모티브와 연쇄살인사건이라는 흥미로운 요소를 덧붙여 블랙 코미디 장르로 살려냈다는 점이 아닐까 싶다. 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보고 듣는 온갖 뉴스들은 모두 진실일까? 혹시라도 활자화된 채 인터넷에 떠돌아다니거나 신문 지면에 오르내리고, 또 영상으로 제작되어 보도되는 사실들에 대해 단순히 언론 보도라는 이유 때문에 부지불식 간 진실로 믿고 있는 건 아닐까? 이 영화는 이러한 관객의 굳건한 믿음을 향해 의문부호 하나를 던진다. '진짜라고 믿으면 그게 진실'이라는 백국장의 일침은 영화관 문을 나서는 우리의 발걸음을 더욱 무겁게 한다.

 

 

감독  노덕

 

* 이미지 출처 : 다음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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