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편린들

박 대통령 거부권 행사, 정치 불신만 부추길 뿐

새 날 2015. 6. 26.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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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이 25일 국회법 개정안에 대한 거부권을 행사했다.  예견됐던 시나리오다.  하지만 예측을 벗어난 부분도 있다.  이날 박 대통령이 정치권을 향해 작심한 듯 쏟아낸 발언은 그 수위가 상당히 높아 모두의 예상을 빗나갔기 때문이다.  일단 거부권을 행사할 수밖에 없었던 배경은 차치하더라도 정치권을 향해 어떠한 쓴소리가 있었는지부터 한 번 살펴보자.

 

ⓒ노컷영상 캡쳐

 

"지금 정부가 애써 마련해서 시급히 실행하고자 하는 일자리 법안들과 경제살리기 법안들이 여전히 국회에 3년째 발이 묶여져 있다. 국회가 꼭 필요한 법안을 당리당략으로 묶어놓고 있으면서 본인들이 추구하는 당략적인 것을 빅딜을 하고 통과시키는 난센스적인 일이 발생하고 있다"

 

"정치권의 존재 이유는 본인들의 정치생명이 아니라 국민들에게 둬야 함에도 그것은 변하지 않는 것 같다. 정치는 국민들의 민의를 대신하는 것이고 국민들의 대변자이지, 자기의 정치철학과 정치적 논리에 이용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정치가 정도로 가지 않고, 오로지 선거에서만 이기겠다는 생각으로 정치를 정쟁으로만 접근하고, 국민과의 신의를 저버리고, 국민의 삶을 볼모로 이익을 챙기려는 구태정치는 이제 끝을 내야 한다"

 

"정치적으로 선거 수단으로 삼아서 당선된 후에 신뢰를 어기는 '배신의 정치'는 결국 패권주의와 줄 세우기 정치를 양산하는 것으로 반드시 선거에서 국민들께서 심판해 주셔야 할 것이다"

 

아무리 곱씹어 봐도 구구절절 옳은 말들 투성이다.  주옥 같다.  우리 정치권이 안고 있는 고질적인 문제점들을 제대로 짚은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의아하지 않을 수 없다.  대통령은 행정부의 수반이고, 입법부는 국민을 대표하는 기관이다.  대통령도 언급한 3권 분립의 취지는 세 권력 간 상호 견제를 유지하여 권력이 한쪽으로 치우치는 현상을 방지하고 궁극적으로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지 않기 위함일 테다.  대통령의 거부권 또한 그러한 장치 중 하나에 속하며, 대통령은 이를 적극 활용한 것으로 읽힌다. 

 

 

때문에 대통령의 고유 권한 중 하나였을 이번 거부권 행사 자체에 대해선 뭐라 딱히 할 말이 없다.  그러나 그 배경과 과정 그리고 대통령의 날 선 발언을 보면, 왜 우리 정치인들이 국민들로부터 외면을 받고 있고, 또한 정치 불신의 늪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지를 여실히 깨닫게 한다.  국회법 개정안 내용에 대해선 입법부와 행정부가 그들만의 채널을 통해 적절한 소통 방법과 수준에서 조율하면 될 일이다.  하지만 대통령이 대화와 타협이라는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 따위를 철저히 무시한 채 극단적인 방식으로 아예 창구를 틀어막은 건 결국 국민을 무시하는 처사와 진배없다.  대통령의 선택은 당장 야당의 반발을 불러오고 있으며, 향후 상당 기간동안 정치권의 경색 국면이 점쳐지는 상황이기도 하다.

 

더구나 공무원연금개혁안 통과 당시부터 입법부에 제동을 걸기 시작한 배경엔 새누리당내의 '친박'과 '비박'을 둘러싼 계파간 권력 헤게모니가 도사리고 있는 정황이 읽히는 탓에 대통령의 정치가 국민을 위해 존재하고 국민을 위한 일에 앞장서야 한다는 식의 표현을 무색케 하고도 남는다.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 시점도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25일은 국회 본회의가 예정돼 있었고, 따라서 메르스 관련법 20여건과 경제관련법안 등 100건에 가까운 법안이 처리 대기 중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 때문에 해당 법안 모두가 발목이 잡히고 말았다.  적어도 대통령이 이날을 피해 거부권을 행사했더라면 해당 법안들의 처리 가능성이 높았던 터라 앞서 살펴본 대통령의 발언들이 더욱 황망하게 다가온다.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아울러 박근혜 대통령이 야당 국회의원 시절, 현재 논란이 되고 있는 국회법 개정안보다 훨씬 더 강제력이 있는 국회법 개정안을 공동발의했음이 언론을 통해 밝혀진 바 있다.  그런데 노컷뉴스 단독보도에 따르면 박근혜 대통령이 서명한 '국회의 시행령 통제법안'이 추가로 확인된 것으로 알려졌다.  국회의원이던 당시엔 현 국회법 개정안보다 더욱 강력한 개정안을 스스로가 발의했으면서도 정작 대통령이 되더니 이에 대한 거부권 행사라는 초강경 자세로 일관하는, 전형적인 이율배반적 태도를 보이고 있는 셈이다.

 

물론 대통령의 이율배반적인 행태는 우리에겐 이미 너무도 익숙한 터라 큰 이슈거리도 아니다.  대통령 후보 당시 내걸었던 공약들은 줄줄이 파기된 바 있고, 신뢰의 정치를 펼치겠다는 약속 또한 모두 헌신짝처럼 내버려진 지 오래이기 때문이다.  스스로는 이러한 행태를 행하고 있으면서 입으로는 지극히 옳은 말만 되뇌이니 대통령의 전매특허인 유체이탈 화법은 이번에도 빛을 발하고 있는 셈이다.  거부권을 행사한 날 대통령은 그 자리에서 다음과 같은 발언을 덧붙였다.  "앞으로 여야 정치권과 언론과 함께 정부가 힘을 합해서 차분히 메르스를 이겨낼 수 있도록 하는데 심혈을 기울여 노력해달라"  거부권을 행사하며 정치권을 맹비난하고 여야 관계마저 극한 대치로 몰고 가더니, 어느새 정치권과 정부가 힘을 합하자는 생뚱맞은 발언을 하고 있는 것이다.

 

대통령을 비롯한 정치인들이 희화화되고 더 나아가 정치마저 웃음거리가 되어버린 세상이다.  위정자들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은 극에 달해 있다.  물론 그들 스스로가 자초하고 있는 셈이지만 말이다.  지난해 한국대학신문이 창간 26주년을 맞아 전국 대학생 의식조사를 벌인 결과, 대학생들이 가장 불신하는 집단 1위가 정치인으로 꼽혔다.  무려 85.3%의 응답률이다.  대통령은 국민과의 약속 따위 모두 파기하고 입으로는 국민을 위한 정치를 말하고 있다.  행정부 수장임을 잊기라도 한듯 늘 유체이탈 화법을 통해 대통령 스스로에 대한 책무로부터 교묘히 빠져나가려고만 든다.  입으로는 3권 분립의 취지를 언급하면서도 정작 행정부가 입법부를 좌지우지하려 하는, 제왕적인 면모마저 과시하고 있는 우리 대통령이다. 

 

정치인들을 신랄하게 꾸짖으면서도 '친박'과 '비박' 간의 정쟁을 공개적으로 유도하여 권력 헤게모니 장악을 위해 거부권 등 극단적인 수단을 활용하기 일쑤인 우리 대통령이다.  어느덧 국민들은 위정자들의 말을 전혀 믿지 못하게 됐으며, 정부 또한 신뢰하지 않는 세상이 돼버렸다.  정치 혐오가 대세로 자리잡은 탓이다.  이런 상황에서 "국민이 선거에서 '배신의 정치'에 대해 심판해달라"는 대통령의 발언은 그야말로 공허하기 짝이 없다.  정작 국가 위기를 자초하고 있는 건 누구이며, 정치 불신은 누구로부터 비롯됐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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