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편린들

우리말 순화가 절실한 또 다른 이유

새 날 2014. 10. 12.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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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난 일반인들 - 당연히 한글과 관련한 직업에 몸담고 있는 분들은 제외다 - 에 비해 적어도 개미눈곱 만큼은 한글에 더 관심을 가졌으리라 자부한다.  물론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겠다면 나 역시 어쩔 도리는 없다.  다만, 어릴적 당시 입고 다니던 티셔츠나 웃옷 등에 한글은 없고 온통 영어로만 휘갈겨놓은 꼴이 나름 못마땅했었는가 보다.  한글로 예쁘게 디자인된 옷을 직접 만들어 이를 보급시키겠노란 당찬 포부를 꿈꿨던 적이 있으니 말이다.  물론 결국 꿈은 못 이뤘지만 지금 돌이켜 봐도 참 기특했던 것 같다. 

 

한글에 대해선 많은 전문가들이 예찬해오고 있다.  난 국문학을 전공한 사람도 아니고 그렇다고 하여 글쓰기를 단 한 차례라도 배운 적조차 없는 전형적인 비전문가이기에 구조적이거나 문법적, 아울러 문학적인 측면에서의 한글의 우수성이나 아름다음 따위를 논하기는 어렵다. 

 

다만, 글을 읽다보면 한글이 뿜어내는 묘한 분위기와 느낌이 정말 놀라워 혼자 보기 아깝다는 생각이 간혹 들 때가 있다.  디자인적인 완성도는 또 어떤가.  멋진 손글씨와 디자이너들에 의해 재탄생된 한글을 보고 있자면 정말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만큼 아름다움의 향연 그 자체다.  전문적이거나 과학적인 우수성을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이렇듯 생활속에서 그의 우수성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으니 얼마나 가슴 뿌듯한 일인가.  우린 세종대왕님께 두고두고 감사해야만 한다.

 

ⓒ뉴시스

 

지난 9일은 한글날이었다.  1990년, 너무 많은 휴일 때문에 산업 발전에 장애가 된다는 이유로 한글날이 법정공휴일에서 제외되는 비운을 맞이했던 바다.  다행히 지난해부터 휴일의 지위를 되찾긴 했지만 말이다.  한글날 즈음이면 각종 대중 매체들은 한글의 우수성을 설파하고, 온라인 상에선 단 하루만이라도 영문으로 된 타이틀 이미지를 한글로 바꾸는 따위의 이벤트를 통해 요란법석을 떨곤 한다. 

 

물론 언론은 스스로의 고유 기능을 살려 우리글이 천대시되고 있는 상황을 사회에 고발하거나 알려 한글 사용 고취를 한껏 돋우는 작업을 병행해오고 있다.  하지만 그뿐이다.  10월 9일이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듯 예전 상태로 되돌아가기 바쁘다.  물론 단 하루의 노력만으로도 우리 사회에 긍정적인 신호를 줄 수 있다는 사실은 매우 바람직한 일이긴 하지만 말이다.  



최근 서울 잠실을 기점으로 전국 곳곳에서 발견되어 불안감을 키우고 있는 싱크홀 현상에 대해 국립국어원은 지난달 이를 우리말  '땅꺼짐' 내지 '함몰구멍'으로 순화하여 사용할 것을 권고한 바 있다.  마침 한글날 즈음이기도 하거니와 사회적 공기로서의 막중한 책무를 지닌 언론이기에 틀림없이 국립국어원에서의 권고대로 이를 우리말로 순화시켜 사용하고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관련 기사를 검색해 보니 여전히 '싱크홀'이란 용어가 대세를 이루고 있다.  한글날이 지난 지 불과 몇일이나 지났다고 이런 식인 건지 참 답답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  한쪽에선 우리말 순화 운동을 펼치고 있지만, 막강한 영향력을 휘두르고 있는 또 다른 한쪽에선 애써 이를 모른 척하기 바쁜 게 아닌가.  그 이유는 잘 모르겠으나 별로 간여하고 싶지 않아 하는 눈치인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한편, 최근 포털사이트 다음이 카카오와 합병을 하며 다음카카오로 새출발을 시작했는데, 그와 함께 사이트의 일부 개편도 이뤄진 모양이다.  뉴스를 싣던 페이지의 변화가 가장 눈에 띤다.  사회, 정치 등 세분화된 각 분야별로 해당 페이지에 들어가게 되면 아래쪽에 '연재'라는 코너가 새로 생겼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중 사회 영역에 들어갔더니 아래와 같은 기사들이 주욱 나열되어 있는데, 총 4개의 연재 기사 가운데 내 눈을 사로잡는 목록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다름 아닌 '시월드의 범고래는 왜 귀찮은듯 물을 튀겼나'라는 제하의 기사였다.  이 기사 제목으로 인해 난 본의 아니게 한글과 영어 사이를 오락가락거리는 인지의 혼돈 상태를 맛봐야만 했다.  우선 '시월드'만 놓고 볼 땐 최근 유행하고 있는 신조어로써 온라인 오픈 국어사전에도 등재되며 점차 표준어 자리까지 호시탐탐 넘보는 이른바 '시댁'을 뜻하는, 그래 맞다 분명 그걸 떠올리게 된다, 의미가 연상되고 있었다.

 

하지만 '시월드' 뒤에 곧이어 등장하는 범고래를 보고 있자니, 어쩔 수 없이 시댁이 아닌 'Sea World'가 이내 떠오른다.  결과적으로는 후자의 의미로 사용된 게 분명 맞다.  바다를 뜻하는 'Sea'는 보통 우리말로 읽을 때 경음화되어 '씨~'로 발음되지 않나 싶다.  때문에 '시월드'보단 '씨월드'란 표현이 오히려 원래의 의미에 더 부합하지 않을까 싶은 게 솔직한 속내다.

 

 

이러한 생각은 나뿐만이 아니었는가 보다.  해당 기사에 달린 댓글 일부에선 요새 한참 대세로 떠오른 '시댁'의 의미를 떠올린 분들을 볼 수 있었고, 바다를 나타내고자 한다면 다른 방식으로 표현했어야 함이 옳지 않겠느냐는 반응도 볼 수 있다. 


우리글을 사랑하자며 외치는 뻔한 소리는 사실 별로 듣고 싶지가 않다.  특별한 날만 되면 요란법석거리는 매체와 대중들의 모습 역시 별로다.  우리말 우리글을 사랑하자란 주장은 실은 별로 거창한 게 아니다.  우리가 늘상 사용하는 말과 글을 조금 더 신경 써서 순화시키거나 의식적으로 좋은 표현으로 사용하려 애쓰면 된다.  그렇지만, 이러한 개인들의 노력보다 역시 언론 매체가 나설 경우 훨씬 좋은 성과를 얻을 수 있을 테다.  형식적인 이벤트보다 일상속에 녹아들어간 작은 노력들이 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선 안 된다. 


'시월드'란 표현이 개인적으로는 매우 거슬린다.  물론 순전히 내가 남자이기 때문에 느껴지게 되는 거부감이 가장 큰 이유일 테다.  하지만 그보다는 어휘를 통해 와닿는 어감이 가히 좋은 의도가 담긴 표현이 아닌 데다 외래어인지 외국어인지의 여부조차 종잡을 수 없는 '월드'라는 단어마저 포함됐기 때문이다.  또한 '시월드'의 반대 개념인 '처월드'라는 표현마저 등장하는 아주 좋지 않은 역기능이 당장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알다시피 말이나 글은 생명체와 같아 늘 변화해가며 시류를 따르는 법이다.  '시월드'를 통해 전혀 다른 두 가지의 의미를 동시에 떠올려야 하는 우리, 어쩌면 우리말 순화가 절실한 건 바로 이러한 연유 때문이 아닐까 싶다.  같은 표현이더라도 이왕지사 순화된 한글 표현이 우리 모두를 조금 더 기분좋게 만들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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