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접 경험의 즐거움

울분을 토해내듯 치열하게 '변산'

새 날 2018. 7. 5. 2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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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의점 등 각종 알바를 전전하면서 래퍼의 꿈을 이루기 위해 고향을 떠나 홍대 부근 2평 남짓 고시원에 둥지를 튼 청년 '심뻑' 아니 김학수(박정민), 그는 모 방송사에서 주최하는 최고의 래퍼를 가리는 서바이벌 각축전 '쇼미더머니'에 '심뻑'이라는 예명으로 벌써 6년째 도전 중에 있다. 이번 도전에서는 패기가 넘쳤던 까닭에 예선을 무난히 통과할 수 있었고 이윽고 본선에 올랐으나 그를 옭아매온 과거의 쓰라린 기억들이 무대 위에서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바람에  그만 온전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만다. 또 다시 고배를 마시게 된 학수다.

 

주변에서는 인생은 7전8기라며 그를 다독이려 애를 쓰는 모습이었지만, 정작 학수는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들이 심드렁하기만 하다. 그러던 어느 날 학수에게 의문의 전화 한 통화가 걸려온다. 학수의 아버지(장항선)가 뇌졸중으로 쓰러져 모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이다. 그는 전화를 걸어온 이가 누구인지도 몰랐던 데다가 썩 내키지 않았으나 어쩔 수 없이 동료로부터 차를 빌려 아버지가 계신 고향 변산으로 급히 향하는데...

 

 

어머니와 자신을 내팽개친 채 건달로 평생을 속 썩이며 살아온 아버지는 그에겐 모두 지워버리고 싶은 굴곡진 과거다. 더불어 30년 전 변산 일대를 주먹 하나로 주름 잡아온 아버지의 삶의 터전이자 그가 태어나고 성장한 공간적 배경인 변산 역시 그저 낡은 흑백 사진 속에서나 존재했으면 하는 바람과 함께 자신의 인생에서 영원히 사라져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굴뚝 같았다. 누군가 고향을 물어올 때마다 자신은 서울 출신이라며 둘러대는 데도 이젠 이골이 날 정도였으니 말이다. 

 


반면 학창시절부터 학수를 일방적으로 좋아했던 정선미(김고은)는 자신의 고향 변산을 터전 삼아 그녀만의 방식으로 삶을 개척해 나가는 똑부러진 인물이었다. 아버지라면 치를 떨던 학수에게 일부러 전화를 걸어 병문안이라는 압박을 가한 것도 다름 아닌 선미였다. 한 사람은 자신이 나고 자란 변산을 죽기보다 싫어하는 인물로 그려져 있고, 또 다른 한 사람은 변산의 노을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이를 소재로 문학계에 등단할 만큼 고향과 고향사람을 좋아하는 인물로 그려져 있으며, 이 두 사람을 각각의 축으로 이야기를 전개해 나간다.

 

 

영화 '레이디 버드'에서 주인공은 자신이 살고 있는, 조금만 벗어나면 촌 냄새가 물씬 풍기는 소도시 새크라멘토가 너무도 싫었다. 막연하게 화려함을 동경했던 그녀의 시각에 새크라멘토는 대도시 뉴욕에 비해 지나치게 초라했던 것이다. 모든 게 후져 보였다. 대학 진학은 새크라멘토를 떠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변산'의 학수 역시 그 이유가 레이디 버드와는 차원이 전혀 다른 사안이었으나 어쨌든 자신의 고향 변산이 지긋지긋했다. 낡은 것투성이에, 사람들은 죄다 꼰대였으며, 온통 지루한 것들 천지였으니 오죽했겠는가 싶다.

 


아버지와의 좋지 않은 인연과 추억이 얽혀 있어 더더욱 변산이 싫었던 그다. 어떡하든 이곳에서 도망쳐야 했다. 비록 두 평짜리 고시원을 전전하고, 편돌이나 발렛파킹 따위의 알바 생활에서 벗어날 수 없는 처지가 된다 하더라도 일단 고향에서 최대한 멀리, 그리고 자신의 꿈을 펼칠 수 있는 곳으로 도망쳐야 했다. 하지만 선미의 사심 가득한 행위(?)에 의해 고향 앞으로 강제 소환된 학수, 의도치 않은 사건과 동창생인 미경(신현빈), 용대(고준) 등과의 얽히고설킨 관계로 인해 본의 아니게 변산에 발이 묶이고 마는 그다. 학수는 과연 지긋지긋한 이곳 변산으로부터 영원히 탈출할 수 있을까?

 

 

병에 걸려 침상에 드러누운 아버지와 그의 병 문안을 온 학수, 그동안 이들 사이에 쌓인 감정의 골은 상당히 깊다. 때문에 두 사람은 얼굴을 마주칠 때마다 서로의 정제되지 않은 날 것 그대로의 감정을 고스란히 드러내며 맞부딪히기 일쑤다. 아버지는 무언가 말 못할 사연이 있는 듯 이를 숨기느라 행동이 조심스러운 반면, 학수는 아버지의 속 깊은 마음을 일절 헤아리지 못하고 되레 그러면 그럴수록 못미더운 행동이 더욱 꼴보기 싫어진다. 아버지를 미워하는 만큼 고향인 변산도 덩달아 싫었던 그다. 과거에 얽매인 채 자꾸만 삐딱해져가는 학수를 바라보는 선미의 시선은 자못 날카롭다. 이들의 관계는 과연 어떻게 될까?

 

 

레이디 버드는 평소 꿈꿔오던 뉴욕으로의 대학 진학에 성공하게 된다. 꿈에 그리던 화려한 뉴욕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한없이 초라하고 촌스럽기만하던 새크라멘토가 달리 다가오기 시작한다. 조금만 벗어나면 정겨운 시골 풍광을 느낄 수 있는 소도시 새크라멘토는 사실은 너무도 사랑스러운 곳이었으며, 사람들은 하나 같이 친절했다. 정작 그녀가 그렇게 바랐던 거대 도시 뉴욕과 비교해 보면 이처럼 사람 살기 좋은 곳도 사실은 드물었던 셈이다.

 

 

변산의 노을은 아름답다. 스크린 위로 펼쳐지는 붉게 물든 풍광은 혹시 CG로 구현된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 만큼 멋진 것이었다. 정작 이 멋진 노을을 최초로 가슴에 품었던 이는 학수다. 학수는 변산이 싫다며 손사래를 치고 있지만, 그런 학수를 오래 전부터 일방적으로 짝사랑해오던 선미는 학수가 한때 품었던 그 노을을 오랜 시간 가슴에 품어 왔다. 이를 조심스레 끄집어 내보이는 그녀다.

 

 

박정민이 직접 가사를 쓰고 불렀다는 힙합 장르의 랩은 이 영화의 시작부터 끝 지점까지 극을 지탱하는 힘이자 토대가 된다. 관객들로 하여금 흥을 제대로 돋우는 역할도 도맡아 한다. 마치 울분을 토해내듯 그의 목줄기로부터 힘차게 솟구쳐나오는 치열한 가사의 랩송은 힘겨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수많은 또 다른 학수들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있으며, 그들을 따스하게 감싸 안는다. 화려한 군무를 통해 잠시나마 달달하면서 행복한 감성을 느낄 수 있었던 건 덤이다.



감독  이준익


* 이미지 출처 : 네이버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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