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접 경험의 즐거움

보잘 것 없는 사물에 깃든 삶의 흔적 '사물의 민낯'

새 날 2018. 6. 30. 1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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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마다 응당 해야 하는 일이 있다. 물론 부끄러운 얘기이지만 정말로 귀찮을 경우 때때로 이를 그냥 건너뛰기도 한다. 다름 아닌 수염을 깎는 행위이다. 수십 년을 반복해온 일이라 이젠 이골이 날 법도 하건만 여전히 내겐 꽤나 귀찮은 일 가운데 하나다. 남들은 잘만 활용하는 전기면도기로는 깨끗하게 깎이지 않기에 어쩔 수 없이 수동면도기를 활용해야 하는 처지 탓일까? 게다가 기왕지사 국산 제품을 이용하고 싶은데, 제기럴 이놈의 면도날 제조는 여전히 독일 기술을 도무지 따라갈 수가 없는 모양이다. 철을 비롯한 금속 재질을 미세하게 다듬는 공정이 그리도 어려운 일일까?


그런데 오늘 아침 또 다시 사달이 빚어지고 말았다. 최대한 조심스레 한다고 했건만 면도날이 그만 내 소중한 살의 영역을 슬쩍 파고든 것이다. 칼에 베일 때보다 종이에 베일 때가 왠지 더 아프게 다가오듯이 이 놈의 면도날로 인한 상처는 유독 아프다. 더구나 다른 곳도 아닌 얼굴이 베인 탓에 짜증이 확 올라오는 경우가 다반사다. 기술이 제아무리 발달했다고 하지만 손에 의해 가해지는 힘의 미세한 차이와 움직임의 각도에 따라 칼날은 여전히 사람들에게 위협적이다. 섬세할수록 더욱 그러하다.


그렇다면 기술 수준이 지금에 비해 월등히 못 미쳤을 과거에는 얼마나 많은 남성들이 아침마다 이 날카로운 칼날에 의해 비명을 질러댔을까를 생각하면 아찔하기 짝이 없다. '잡동사니로 보는 유쾌한 사물들의 인류학'이라는 부제가 붙은 책 '사물의 민낯'에 따르면, 남성들의 숱한 상처와 피의 산물인 면도기가 대중화되지 않았던 시절, 이발사들이 의사를 겸업했던 사례가 많았다고 한다. 면도를 하다가 상처가 발생하는 경우 이를 직접 응급 처치해야 했기에 자연스레 의료기술을 습득하게 됐고, 어느덧 의사 면허까지 취득하게 된 것이다. 말그대로 필요에 의한 산물이었던 셈이다. 



이런 이야기를 접하고 보니 그나마 오늘날 제법 정교하게 깎이는 면도기의 존재가 새삼 고맙지 않을 수 없다. 이 책을 읽다 보면 조금은 당황스러운 내용들도 더러 만나게 된다. 근래엔 흔한 간식 가운데 하나인 '콘프레이크'류의 시리얼이 사실은 자위 행위를 막기 위해 개발된 음식이라는 사실은 흥미를 유발해 온다. 돈가스의 유래도 재미있기는 매한가지다. 불교의 영향으로 한동안 육식이 금지됐던 과거 일본 사회, 이로 인해 대중들은 고기에 대한 거부감이 커져 육식이 가능해진 뒤에도 잘 먹지 않자 고기를 먹도록 하기 위한 방법을 고안하다가 최대한 고기처럼 보이지 않게 하고 색다른 식감을 주기 위해 두꺼운 빵가루에 튀기게 된 것이 오늘날 우리가 먹는 형태의 돈가스란다. 


안경의 발달이 인쇄기술과 궤를 함께해왔다는 사실은 고개를 절로 끄덕이게 한다. 인류에게 있어 인쇄기술은 일종의 축복이다. 오늘날과 같은 놀라운 문명을 이룰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인쇄기술이 그 역할을 톡톡히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활자를 읽기 위해서는 시력 교정이 필요했으며, 안경은 이러한 욕구를 충족시켜준다. 인쇄기술은 안경에 의해 날개를 단 셈이다. 안경을 통해 시력이 교정된 이들이 더 많은 활자를 읽고 싶어했기 때문이다. 인쇄기술이 안경 수요를 창출하였고, 안경의 확산은 다시 더 많은 활자를 요구하게 되는, 마침내 선순환의 구조가 완성된 것이다. 



이 책은 은밀한 것들, 익숙한 것들, 맛있는 것들, 그리고 신기한 것들 등 총 4장으로 구성돼 있으며, 각 장마다 10개 안팎의 사물들에 얽힌 기원과 그에 따른 사연들이 소개돼 있다. 일상에서 무심코 이용하거나 소비하는 것들에 대해 호기심을 갖고 이들의 역사를 찾아가는 과정 속에서 저자는 삶의 본질을 꿰뚫어 본 것이다. 늘 이용해 오고 있지만, 어쩌면 너무도 당연하여 그 존재감을 잊은 녀석들, 그 기원을 파고들다 보니 거기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고민과 욕망, 그리고 삶의 애환 따위가 고스란히 깃들어 있는 게 아닌가. 


그러나 때로는 과학적인 뒷받침이 없는 떠도는 풍문이 하나의 정설이 되어 여전히 인구에 회자되고 맹신되어지는, 다소 어이없는 일들도 횡행한다. 대표적인 게 바로 포경수술이다. 굳이 필요가 없다는 데도, 아니 도리어 해롭다는 데도 불구하고 이와 관련한 대중들의 굳건한 믿음은 우리나라를 전 세계 포경수술 으뜸국으로 등극시켜놓았다. 어찌 보면 우습기 짝이 없다. 


아울러 아름다움을 숭상하고 이를 추구하고자 하는 인간의 본성은 과거나 지금이나 별반 차이가 없는 듯싶다. 원래는 전쟁에서 부상을 입은 군인들의 치료를 위해 등장한 성형수술, 관련 기술이 나날이 발전하고 성형 후의 아름다움이 수술 과정의 고통과 후유증 발생의 위험 요소까지 충분히 뛰어넘고도 남을 만큼 더 큰 매력으로 다가오기 시작하면서 어느덧 수많은 사람들이 기꺼이 이에 동참하고 있다. 하이힐 또한 비슷한 맥락이다. 발 모양의 기형을 불러오고, 염증을 유발하거나 심지어 신체의 균형마저 무너뜨리는 등 우리 몸에 치명적인 위해를 가함에도 불구하고 많은 여성들은 오로지 아름다움과 패션의 완성적인 측면 때문에 과감히 이에 베팅한다. 



하얀 치아는 예나 지금이나 아름다움의 척도 가운데 하나로 간주돼 왔다. 칫솔과 치약이 없던 시절에는 하얀 치아를 유지하기 위해 일종의 민간요법으로 알려진 오줌으로 입안을 헹구는 행위가 횡행했단다. 인간의 아름다움을 향한 끝없는 욕망은 고통 감내는 물론이며, 때로는 수치심과 모멸감마저 기꺼이 감수케 했던 것이다. 치아 건강은 오복 가운데 하나로 받아들여질 만큼 매우 중요한 요소였는데, 돌이켜보면 오늘날과 같은 치아 건강을 유지해주는 제품이 미흡했을 당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치아로 인한 고통 때문에 몸부림쳤을지 짐작되고도 남게 한다. 


우리가 흔히, 그리고 즐겨 사용하는 사물에는 사람의 손때가 잔뜩 묻어 있기 마련이다. 여기서의 손때란 오래, 자주 사용하다 보면 닳고 닳아 발생하는 물리적인 해어짐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어떤 사물 하나가 탄생하기까지 그에 얽힌 사람들의 다양한 사연과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사물의 진화 과정을 통해 엿보게 되는 우리네의 살아가는 삶의 방식과 흔적, 숱한 고민들을 품는 의미로 해석해야 할 듯싶다. 


사물의 민낯이란 결국 인간이 삶을 일구고 지탱해올 수 있었던 본연의 에너지와 이를 뒷받침하는 사회 현상의 원동력이 아닐까 싶다. 저자가 사례로 꺼내든 몇몇 종류의 사물뿐 아니라 우리 주변에서 무심코 사용되는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숱한 사물에는 생물처럼 정령이 깃들어 있을 수는 없겠으나, 그 이면에는 다양한 사회 현상과 인간의 욕망 그리고 삶의 흔적이 깃들어 있다. 



저자  김지룡, 갈릴레오 SN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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