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접 경험의 즐거움

이 시대 청춘들의 자화상 '누에치던 방'

새 날 2018. 3. 29. 2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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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동안 사법고시를 치렀으나 번번이 고배를 마셔야 했던 채미희(이상희)는 어느 날 전철에서 한 여고생을 만나 무작정 그녀의 뒤를 쫓으며 살고 있는 집의 위치를 확인한다. 채미희가 그 집의 벨을 눌렀으나 여고생은 없었고, 대신 조성숙(홍승이)이라는 여성이 그녀를 맞이한다. 채미희는 조성숙 더러 다짜고짜 고교 때 절친이었다며 자신을 알아볼 수 있겠느냐고 채근한다. 조성숙은 자신보다 훨씬 어려 보이는 채미희의 뜬금없는 이러한 행동에도 결코 당황해하지 않은 듯한 눈치다. 일단 그녀를 집안으로 들인 뒤 따뜻한 차 한 잔을 함께 마시며 기꺼이 말동무가 되어준다. 


조성숙은 현재 김익주(임형국)라는 남성과 동거 중이다. 그와의 인연은 고등학생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절친이던 김유영(김새벽)과 함께 그를 만나 자신들을 끊임없이 억압해오던 것들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며 성찰하던 아스라한 기억이 있다. 조성숙은 당시의 고민들로부터 그다지 멀리 벗어나지 않았으며, 삶을 통해 이를 실천 중이었다. 연기 활동과 시민운동 등을 병행하며 사회 변혁에 몰두하고 있는 인물로 그려져 있다. 한편 채미희의 돌출 행동은 여기에서 끝이 아니었다. 조성숙과 동거 중이던 김익주와 관계를 맺고, 또 조성숙과는 더욱 친숙해지는데...



채미희는 대학 입시에서 이미 실패를 경험하였으며, 사법고시에서도 연거푸 낙방하게 된다. 우리는 사람을 평가함에 있어 통상 어떻게 살아왔는지 그에 대한 과정이나 삶의 가치관보다는 사회적 지위 따위만으로 견주는 경향이 크다. 사법고시에 무려 10년이란 시간을 쏟아부었으나 변변한 결과물이 없다 보니 주변 사람들이 그녀에게 늘 보내오는 건 차디찬 냉대뿐이다. 별다른 사회생활 없이 고시 공부에만 매달려온 그녀에겐 인간관계도 예전 같지 않았으며, 거듭된 실패 탓에 일종의 대인기피증과 비슷한 증상만이 그녀를 반길 뿐이다. 



고시제도의 폐지가 목전에 온 상황,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이에만 몰두할 수 없는 처지로 인해 그녀는 이래저래 복잡한 심경이다. 자신이 진정 하고 싶은 게 무언지도 모른 채 오로지 부모의 기대와 주변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대학에 진학했고, 또한 사법고시를 준비해온 그녀였다. 때문에 부모와 집의 존재는 언젠가부터 그녀에게 있어 안식처라기보다는 숨통을 조여오는 일종의 거추장스러운 대상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일면식도 없는 조성숙에게 찾아가 품에 안긴 채 울면서 위로를 구해야 할 만큼 그녀의 현재 마음 상태는 많이 아프다. 물론 채미희가 겪는 아픔과 고통은 어른이라는 이유로 어쩌면 내색을 하지 않고 있을 뿐 세상 사람 모두가 비슷하게 겪고 있는 종류의 것일지도 모른다. 손가락으로 살짝만 건드려도 곧 터져버릴 듯한, 이미 한계 상황에 봉착한 상태가 아닐까 싶다. 이는 근래 마음의 병을 앓는 이들이 폭증하고 있는 현상과 같은 맥락으로 보여진다. 워낙 복잡다단한 세상인 까닭에 우리 모두 이로부터 예외일 수는 없다.


영화는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겪고 있을 법한 내면의 고통을 채미희라는 인물을 통해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아울러 주변 사람들과 기이한 방식으로 관계를 맺는 방식으로, 다소 혼란스럽게 묘사하고 있다. 과거와 현재를 끊임없이 오고 가는 시간의 흐름, 그리고 상식의 틀을 깬 복잡하게 얽힌 관계의 구도 속에서도 우리가 갈 길을 잃지 않은 채 영화를 용케 끝까지 볼 수 있었던 건 누구나 공감할 만한 현대인들의 심리적 고통을 작품 속에 잘 녹여낸 덕분이 아닐까 싶다. 



타인의 시선을 지나치게 의식하는 뻔한 삶의 양태로부터 벗어나기만 해도 적어도 지금보다는 숨통이 조금은 더 트일 것 같다는 대사 한 꼭지가 우리의 가슴 속을 깊숙이 파고든다. 영상미보다는 배우들의 대사, 그리고 신과 신 사이에 삽입된 의도적인 침묵을 통해 감독이 의도하고자 하는 바를 가감없이 발현하고 있는 느낌이다. 그저 앞만 보고 가다보면 우리는 주변에 무엇이 있는지, 그리고 자신이 왜 여기에 와 있는지 헷갈릴 때가 간혹 있다. 무한경쟁의 삶 속으로 내처진 채 살아가다 보면 놓치고 있는 것들이 즐비하니 말이다. 



채미희와 조성숙 배역을 맡은 이상희 홍승희의 연기는 매우 진지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여고생 조성숙은 영화 '꿈의 제인'에서 눈여겨 보았던 배우 이주영이 담당했다. 다소 복잡하고 기괴한 스토리이지만, 결국 각각의 신들이 얼기설기 한데 모아지면서 거꾸로 우리에게 질문을 던져온다. 학창시절 절친을 한동안 못 만나다가 수십 년만에 만남이 성사됐는데 녀석으로부터 과거의 모습은 온 데 간 데 없고 전혀 다른 인물로 변모되어 있다면 우리의 심정은 과연 어떨까? 당혹스러울까 아니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할까? 녀석의 모습 속에서 과거의 흔적과 추억을 찾으며 느끼려던 우리의 욕심이 지나친 걸까? 



채미희의 경험 또한 이러한 종류의 것이 아니었을까? 그녀의 선배가 직장 후배들에게 "이제 성인이 되었으면 그에 걸맞는 사람을 만나고 사귀어야 하는 거야" 라며 건네던 조언은 과연 옳은 걸까? 채미희라는 인물은 어쩌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청춘들의 전형이 아닐까? 이제는 아스라한 추억으로 남아 있는 학창 시절, 당시 친구들과 나눴던 무수한 고민들, 그리고 현재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삶의 방식들에 대해 곰곰이 되돌아보게 하는, 매우 진지한 영화다. 



감독  이완민


* 이미지 출처 : 네이버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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