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접 경험의 즐거움

진짜의 나와 마주하는 용기 '커피메이트'

새 날 2018. 4. 1.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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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속 조용한 카페, 손님들의 두런거리는 말소리와 찻잔 놓는 소리만 간신히 들릴 것 같은 분위기다. 인영(윤진서)은 주변에 다른 커피숍도 많은데 늘 이 곳만을 즐겨 찾는다. 이유는 딱히 없다. 그냥 편안하기 때문이다. 오롯이 혼자 앉아 느긋하게 커피 한 잔을 마시며 오후 시간을 소일하는 이 일이 그녀에겐 너무나 즐겁고 행복하다. 그런데 이 곳에 자주 오다 보니 문득 특별한 패턴이 눈에 익숙해지기 시작한다. 특히 한 남자가 자꾸만 눈에 밟힌다. 


그 역시 그녀와 비슷한 시간대에 나타나 혼자서 커피를 즐기다 가곤 했다. 괜시리 이 남자가 끌린다. 인영은 유부녀였다. 하지만 이 남자가 접근해 온다면 왠지 거부하기 힘들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래서 그런지 그런 그를 두고 혼자 오만 가지 상상에 빠져들곤 하는 그녀였다. 그러던 어느 날, 평소와 다름 없이 혼자 앉아 커피를 마시던 인영, 그녀가 머릿속에서 그리던 일들이 현실에서 진짜로 벌어지고 만다. 아뿔싸 실화였다.



그 남자가 인영에게 접근해 온 것이다. 오호, 이런 기적 같은 일이 다 있나. 희수(오지호)라고 했다. 두 사람은 서로 편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해도 좋으나 절대로 카페를 벗어난 곳에서는 만나지 않기로 하는 등 일종의 규칙 따위를 정해야 했다. 혹시나 벌어질지도 모르는, 더 이상의 선을 넘지 않으려는 나름의 고육지책이었던 셈이다. 커피 메이트는 이렇게 하여 탄생했다. 



두 사람은 각기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으며 심리적으로, 그리고 심정적으로 한층 가까워진다. 어린 아이들이나 할 법한 게임을 즐기면서 만면에 웃음꽃을 피우던 인영은 그와의 만남을 통해 일종의 해방감 따위를 만끽하는데... 



희수가 인영에게 털어놓은 과거의 경험과 인영의 삶 사이에는 묘한 공통점 하나가 놓여 있다. 일반적으로 형제나 자매의 출생 순위에 따라 그들 각자의 성격은 크게 달라지기 마련이다. 희수가 과거 대학생 시절 사귀었던 연인은 동생에 대한 피해 의식에 사로잡혀 있었고, 동생 역시 언니의 모든 것을 빼앗아야 직성이 풀릴 정도로 무언가 단단히 뒤틀려 있었다. 



유년시절, 부모의 기대 심리에서 비롯됐음직한 첫째를 향한 일방적인 사랑은 동생에게는 생존 위협으로 받아들여지기 십상이었을 테고, 이는 탄생 순위에 따라 이들이 태생적으로 갖게 되는 생존 본능에서 비롯되는 성향과 맞물리면서 본능적으로 부모의 사랑을 독차지하려는 행위로 발현되곤 한다. 그러니까 희수의 옛 연인 자매 사례의 경우 이들의 탄생 순위와 부모의 성향 그리고 가정 환경 따위들이 한데 어우러져 빚어진 결과물일 개연성이 높다. 



한편 인영의 부모는 유독 교육열이 강했다. 덕분에 인영은 자신의 삶이 아니라 엄마의 삶을 대신 살아주는 느낌이 들 만큼 부모의 인영에 대한 집착은 유별났다. 자식을 통해 자신이 못 다 한 꿈을 이루고자 하는 일종의 보상 심리 같은 것이었다. 엄마의 채찍질이 집요해질수록 반대급부로 인영 스스로의 삶은 더욱 위축돼 갔다. 늘 타인과 비교를 당해야 했던 인영은 내면에 싹 튼 열등감을 주체하기가 어려웠다. 이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그녀 안에 괴물을 키우게 되는 유인으로 작용한다.


덕분에 학창시절 무엇 하나 두드러진 게 없던 인영에게 스스럼 없이 다가와 살갑게 대해주던 친구조차 그냥 친구로서 온전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색안경을 끼고 바라봐야 했다. 오히려 자신보다 모든 면에서 빼어난 그녀에게 왠지 복수를 하고 싶다는 삐뚤어진 열망만이 가득해져 갔다. 앞서 언급한 희수의 옛 연인 자매의 사연과 어딘가 모르게 맞닿아 있는 대목이다. 유년 시기가 됐든 청소년 시기가 됐든, 이는 아마도 과거가 트라우마로 작용하면서 현재의 삶을 옭아매게 하는, 비슷한 사례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인영의 현재 삶은 어떨까? 의사 남편을 둔 덕분에 경제적으로는 물론, 무엇 하나 아쉬울 게 없으며 부족함 없는 삶을 살고 있다. 그런데 참 희한한 일이다. 목수인 희수를 만난 뒤로는 모든 게 달리 다가오기 시작한 것이다. 희수와 게임을 하며 이처럼 마음 놓고 웃어본 기억이 과거에 과연 얼마나 있었을까. 남편에게는 절대로 말할 수 없었던 이야기들을 털어놓으면서 느끼게 되는 희열, 자신의 사소한 이야기에 귀 기울여주고 작은 변화조차 세심하게 신경을 써주는 그로부터 비로소 참 자아를 찾은 느낌, 이런 게 과연 사랑일까?



인영의 남편을 비롯, 주변 친구들은 하나 같이 배경이 좋고 경제적으로도 풍족한 사람들 일색이다. 덕분에 어릴 적부터 어려움이란 걸 전혀 모르고 성장했으며, 작금의 부와 지위는 애초부터 타고난 것이라고 생각하는 부류들이다. 인영의 삶에 모종의 변화가 나타나게 되는 변곡점은 다름 아닌 그녀에게 이들이 본격 속물로 비치기 시작하는 지점이다. 


과거의 트라우마와 환경에 갇혀 자기 자신을 잊은 채 살아온 그녀가 커피 메이트 덕분에 그 단단한 껍질을 스스로 깨뜨리고, 그녀를 옭아매고 있던 굴레로부터 과감히 벗어나 세상 밖으로 한 걸음 힘차게 내딛기 시작한 것이다. 



이 작품은 남성과 여성의 일탈을 노래하는 단순한 로맨스 장르의 영화가 아니다. 한 여성의 성장담을 통해 그녀처럼 과거에 갇혀 스스로가 누구인지를 잃은 채 삶을 허비해 온 이들에게 그 틀을 과감히 깨뜨리고 진짜의 나와 마주하는 진정한 용기를 부여하고 있다.



감독  이현하


* 이미지 출처 : 네이버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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