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접 경험의 즐거움

과거의 삶이 질곡으로 다가올 때 '버텨내는 용기'

새 날 2018. 3. 20. 2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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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무언가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을 경우 흔히 자존감이 곤두박질치는 느낌을 받곤 한다. 혹은 열등감이 느닷없이 치밀어 오르기도 한다. 둘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존재인 까닭에 두더지게임을 하듯 한 녀석을 지그시 누르면 반대로 다른 녀석이 튀어오르는 경향이 있다. 그럴 때마다 속이 씁쓸해지는 데다 스스로에 대한 실망감 때문에 어디론가 숨어버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다. 


하지만 현실은 나의 의지대로만 움직일 수가 없으니 더욱 답답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 결국 현실과 적절한 타협점을 찾으려 시도한다. 현재 드러난 능력과 문제점에 대해 그의 원인을 되도록이면 나의 능력 밖으로부터 찾으려 부단히 애를 쓰는 것이다. 왠지 그래야만 상처를 덜 받을 것 같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나는 성격이 원래 내향적이기 때문에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어' 라고 말하며 위안을 삼거나 혹은 '과거 경험했던 끔찍한 트라우마가 나도 모르는 사이 내 의식을 점령해버렸어. 이로 인해 사단이 벌어진 거야' 따위의 그럴 듯한 구실로 핑계를 대기 일쑤다. 절대로 스스로의 노력 부족에 대해선 문제 삼지 않은 채 타고난 유전적 성향 탓으로 원인을 돌려보기도 하고, 이도 성에 안 차면 과거 특별한 경험으로부터 비롯됐으리라 믿고 싶은 일종의 트라우마 따위를 끄집어내보기도 한다. 그도 아니면 부모의 양육 방식 때문이라며 현재 자신이 처한 현실을 합리화할 만한 구실 내지 수단을 어떡하든 만들기 위해 골몰한다. 



나 스스로를 합리화할 수 있다면 어떤 종류의 것이든 상관 없다. 당장 급한 불을 꺼야만 자책과 수치심으로부터 조금이라도 벗어나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이른바 원인과 결과론이다. 현재 자신의 처지를 유전 등 생득적 원인으로 돌리든 아니면 부모의 양육 방식과 같은 성장 환경으로 돌리든 이를 통해 나의 의도에 맞는, 혹은 내가 받아들이기에 적합한 것을 찾아낸 뒤 여기에 의미를 부여하고 적당히 숨을 곳을 찾는 방식이다.


이 이론에 따르면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심리적 어려움은 온전히 과거가 그 원인이다. 대부분의 심리학을 다루는 서적들 역시 이 원인과 결과론을 기반으로 한다. 따라서 치료법도 과거 어느 시점엔가 자신에게 짐지워지게 한 원인을 찾고 그에 따르는 해법을 제시하는 방식이 주를 이룬다. 이렇듯 우리는 심리적으로 겪고 있는 문제의 원인이 늘 과거에 있다고 믿는 경향이 크며, 따라서 과거로부터 이의 해결책을 찾고자 한다. 


하지만 모든 행위에는 특별한 의도나 목적이 숨어 있기 마련이며, 그 원인과 결과만으로 특정 행위의 모든 것을 설명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우리는 과거의 경험 속에서 현재의 상황에 부합할 만한 특정 목적을 찾아내곤 한다. 그러나 과거의 경험이 우리의 삶을 결정한다면, 지금과는 다르게 살아가도록 이끌어주는 모든 행위들이 전부 다 부질없는 짓이 되고 만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얼마나 끔찍한 일이겠는가. 



물론 우리의 삶이 과거의 특별한 경험이나 부모의 양육 방식과 같은 성장 환경에 의해 영향을 전혀 받지 않는다고는 볼 수 없다. 그러나 특정 문제의 원인을 설령 과거로부터 찾았다고 한들 그 당시로 다시 돌아가 사건을 되돌릴 방법은 단언컨대 없다. 때문에 아들러는 자꾸만 과거에 천착하고 원인과 결과만 따져서는 현재 우리에게 주어진 문제를 해결하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단언한다. 


오히려 그는 시선을 과거가 아닌 현재와 미래로 향해야 한다고 본다. 이른바 목적론이다. 과거로 눈을 돌려 현재 증상을 분석하기만 하는 심리학은 문제 해결 능력이 전혀 없다고 주장한다. 우리의 삶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까지 가느냐가 아닌, 어딘가에 도착하지 않아도 시시각각 지금을 살아내고 있는 관점으로 바라 봐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선택은 결국 우리 스스로의 의지에 의한 것임을 강조하고 나선 그다. 동일한 현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180도 달라지니 심리적 어려움과 그 문제적 증상으로부터 벗어나는 방식 또한 완전히 달라질 수밖에 없다. 


목적론은 목적이나 목표의 시점을 과거가 아닌 미래에 둔다. 과거는 바꿀 수 없어도 미래만큼은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고방식이다. 심지어 성격마저 바꿀 수 있다고 주장한다. 아들러의 개인심리학에 따르면 성격이라는 의미의 라이프스타일은 우리의 의지에 의해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 성격조차도 사실은 특정 목적에 의해 스스로 결정한 성질의 것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모든 사람은 타자와의 관계를 피할 수 없으며, 혼자서는 이 세상을 결코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이기에 자기중심적 삶에서 벗어나 타자에 대한 관심을 갖도록 하는 공동체감각을 강조하고 나섰다. 



비록 현실에서 이상을 찾지 못하더라도 현실을 그대로 인정할 게 아니라 이상에 가까워지도록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는 게 아들러가 주장하는 삶을 대하는 바람직한 방식이다. 아들러 개인심리학의 전도사 역할을 자처하고 나선 이 책의 저자는 자녀 양육 과정에서 나타날 수 있는 신경증과 응석받이 아이들의 특징을 설명하고, 아들러의 개인심리학에 의해 이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차근차근 조언하고 있다. 


난 어떤 일이 잘 안 될 때마다 나의 생득적인 생물학적 특성 내지 과거를 이유로 '그러니 잘 안 돼지' 하며 합리화하기 바빴다. 물론 이렇게 행동하는 데엔 뚜렷한 목적이 있었다. 나의 노력 부족을 감추기 위한 일종의 구실이었다. 그러니까 현실 도피와 비슷한 행위였다. 대부분의 심리학을 다룬 책들 역시 어떤 특정 현상에 대해 각기 과거의 경험과 유전적 성향 등을 원인으로 들며 이로부터 벗어나도록 하는 방식에 주력하고 있다. 


그러나 아들러와 이 책의 저자에 따르면 지금까지의 인생은 앞으로의 삶을 어떻게 살아가는가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우리가 주시해야 할 것은 과거가 아닌 미래이기 때문이다. 현재의 삶이 여전히 과거에 얽매인 채 질질 끌려가며 살아가야 한다면, 아니 운명론자들의 주장처럼 어떤 틀안에 갇힌 형태의 것이라면, 우리의 삶은 앞으로도 희망을 기대하기가 어렵다. 아들러는 운명론이니 종교적 관점이니 혹은 낙천주의 따위로부터 멀찌감치 떨어져 이 세상을 바라본다. 현재의 어려움을 꿋꿋이 버텨낼 수 있는 힘도 다름 아닌 이로부터 기인하는 것이라 힘주어 말한다.



저자  기시미 이치로

역자  박재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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