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접 경험의 즐거움

지고지순한 사랑의 대가 '로즈'

새 날 2018. 3. 14. 2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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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병원에 갇힌 채 무려 50년의 삶을 허비해버린 로즈(바네사 레드그레이브)는 그녀가 낳은 아기를 죽였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물론 로즈 스스로는 결코 아기를 죽인 일이 없다고 항변하고 있는 입장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녀 주변엔 로즈의 말을 곧이 곧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없다. 어느 날 병원 이전 계획 때문에 그녀의 소지품들이 막무가내로 버려진다. 과거의 삶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는 소중한 것들을 본인의 허락도 없이 버리려 하는 병원 측의 야만적인 행위에 이를 완강히 거부하고 나선 로즈다. 



그녀의 행동으로부터 본능적으로 진정성과 비슷한 류의 존재 따위를 간파한 정신과 의사 그린 박사(에릭 바나)는 간호사(수잔 린치)와 함께 로즈의 이야기를 차근차근 듣기 시작한다. 로즈는 정신병원 입원 이래 자신의 생각을 성경책에 끊임없이 기록해왔으며, 이를 펼치자 수십 년 동안 차곡차곡 쌓아온 비밀스런 이야기들이 하나 둘 세상 밖으로 드러나기 시작한다. 2차세계대전이 한창이던 당시, 젊은 로즈(루니 마라)는 전쟁 위협이 턱밑까지 밀려들어오자 아일랜드로 피신, 이모가 운영하는 카페에서 지내게 된다. 



당시의 보수적인 사회 분위기는 남성보다 여성의 삶을 더욱 옥죄는 형국이었다. 아일랜드에서는 부부 사이가 아닌 이상 여성이 남성의 눈을 똑바로 쳐다볼 수 없을 정도로 억압적인 분위기가 만연했다. 하지만 로즈는 남달랐다. 이러한 분위기에 개의치 않았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냈다. 그 때문인지 뭇남성들의 로즈를 향한 시선은 뜨거웠다. 그녀만의 자신만만한 태도가 희한하게도 남성들의 정복욕을 더욱 부추겼던 모양이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곤트 신부(테오 제임스)의 접근은 더욱 집요했다. 그러나 로즈가 정작 마음에 품고 있던 남성은 2차세계대전에 참전한 마이클(잭 레이너)이었다. 짧은 만남을 뒤로 하고 둘은 헤어지는데... 



영화의 시간적 배경이 되고 있는 2차세계대전 즈음의 아일랜드 상황은 복잡 미묘했다. 영국과의 갈등은 첨예했으며, 더구나 제2차세계대전에 중립을 선언한 아일랜드를 향해 영국이 참전을 요구해오면서 갈등의 골은 더욱 깊어만 갔다. 종교적 마찰 또한 극심했다. 영국으로부터 독립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일랜드 내에는 영국의 영향력이 미치는 신교도와 구교도의 마찰이 끊임없이 이어져오던 찰나다. 



때문에 로즈가 맞닥뜨리게 된 불행은 표면적으로 볼 때엔 그녀에게 연정을 품던 곤트 신부의 비뚤어진 질투심과 시기에 의한 것으로 보여지나 그 이면엔 아일랜드와 영국과의 갈등 그리고 구교도와 신교도 사이의 종교적 마찰 따위의 복잡한 배경이 자리하고 있다. 



아일랜드의 '서배스천 배리'가 쓴 소설 'The Secret Scripture'가 이 작품의 원작이다. 이 소설은 2008년 코스타상 수상, 맨부커상 최종후보작, 2009년 아이리쉬 어워즈에서 ‘올해의 소설’로 등극했던 작품이기도 하다. 


로즈의 운명은 왠지 그녀 어머니의 전철을 고스란히 밟는 느낌이다. 그래서 마음이 더욱 아프고 무겁다. 로즈의 어머니는 아버지를 너무도 사랑한 나머지, 아버지가 먼저 세상을 뜨자 마음의 병을 앓다가 결국 정신병원에 수용되는 운명을 맞이하게 된다. 주변 여건에 아랑곳하지 않은 채 오롯이 자신의 신념에 따라 꿋꿋하게 마이클을 사랑한 로즈, 덕분에 그녀 역시 정신병원에 가둬진 채 무려 50년을 그곳에서 살아야 했다. 기막힌 운명이다.



앞서도 언급했듯 당시 시대적 배경에 의한 갈등 상황, 그리고 마이클을 향한 시기심이 특정인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수준의 사회적 지위와 결합하면서 빚어진 결과물 치고는 한 사람의 삶을 너무도 가혹한 상황으로 몰고 갔고, 지나치게 망쳐놓았다. 로즈가 정신병원에서 겪은 고초는 이루 말로 형언할 수 없을 만큼 끔찍한 종류의 것이었다. 누군가를 사랑하여 겪은 대가라고 하기엔 지독하게 잔인했다.



마이클과의 달콤했던 잠시잠깐 동안의 시간은 그녀가 정신병원에서 머물던 시간과 비교하면 그야말로 찰나에 불과하다. 반지가 없어도, 아울러 단 한 사람의 하객조차 없어도, 두 사람만이 올린 결혼식은 행복했으며, 황홀함 그 자체였다. 아름다운 아일랜드의 풍광을 배경으로 두 사람이 바이크를 타고 함께 내달리던 모습은 행복감의 극치를 이루는 장면이다. 



감독의 섬세한 연출에 배우들의 열연이 더해졌다. 당시의 시대상을 드러내는 의상이나 소품 그리고 음악 등에도 정성을 기울인 흔적이 역력하다. 아버지의 음악적 재능을 그대로 타고난 로즈가 피아노로 월광소나타를 연주하는 모습은 50년이라는 긴 세월을 정신병원에 가둬놓은 채 그녀의 심신을 완전히 망가뜨려놓았음에도 불구하고 마이클을 향한 애정이 여전히 건재함을 드러내는 멋진 장면이다. 한 사람을 향한 로즈의 지고지순한 사랑은 우리의 심금을 울리고도 남는다. 반전이 남긴 긴 여운과 함께 다양한 감정을 느끼게 하는 작품이다.



감독  짐 쉐리단


* 이미지 출처 : 네이버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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