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편린들

나가 아닌 우리, 혼자가 아닌 같이

새 날 2018. 2. 20. 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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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끼와 거북이가 달리기 경주를 시작했다. 누가 보더라도 기량이 월등한 토끼가 먼저 들어올 것으로 점처지는 상황이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자신의 실력을 과신이라도 한 듯 토끼가 짐짓 여유를 부리더니 중간에 잠까지 청하는 게 아닌가. 그러는 사이 거북이는 쉼없이 그리고 묵묵히 제 갈 길만을 간다. 결국 거북이가 먼저 들어온다. 누구나 알고 있는 토끼와 거북이 우화다. 우리는 이로부터 제아무리 실력이 월등해도 잔꾀를 부리거나 게으름을 피우다 보면, 결국 실력은 다소 모자라지만 끊임없이 노력하는 이를 결코 이길 수 없다는 교훈을 얻는다. 


그러나 근래엔 이 우화가 재해석되고 있다. 중간에 잠이 든 토끼를 깨워 공정한 경기를 펼치며 끝까지 함께했어야 함에도 거북이는 이를 무시한 채 오로지 저 하나만 살겠노라며 계속해서 갈 길을 간 끝에 결국 결승선을 먼저 통과했기 때문이다. 어떡하든 이기기만 하면 된다는, 가뜩이나 경쟁 일변도의 요즘 세상에서 그러한 류의 의식을 더욱 깊이 심어주고 있는 탓에 오늘날 이 우화가 대중들로부터 외면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평창올림픽 스피드스케이팅 여자 팀추월 준준결승전에서 우리 팀은 8개 국 가운데 7위를 차지하며 토너먼트 진출에 실패했다. 이 경기 결과를 놓고 지금 이 시간에도 무수한 뒷말이 오고가는 와중이다. 물론 단순히 토너먼트 진출에 실패하게 된 경기 결과 탓만은 아니다. 선수들이 제 기량을 오롯이 발휘했다면 순위는 둘째치고 관객들은 마땅히 열과 성을 다한 그들의 노고에 박수를 쳐줄 만큼의 아량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이번 경기는 그러한 성격과는 거리가 멀다. 팀추월 경기인 까닭에 세 사람이 한 조가 되어 팀워크를 발휘, 각자의 기량을 팀 속에 녹여 하나의 형태로 최대한 끌어올렸어야 하는데, 경기 내용은 그와는 전혀 판이했던 까닭이다. 세 사람이 하나가 되어 서로의 기운을 북돋고 밀거니 당기거니 하면서 동시에 결승선을 통과했어야 하나 두 사람은 훨씬 앞서 들어왔고, 나머지 한 사람은 멀찍이 뒤로 처진 채 일정한 시간이 지난 뒤에야 들어왔다. 


경기 특성상 처음 결승선을 통과한 사람이 아닌, 마지막에 들어온 사람 기준으로 성적이 매겨지기 때문에 세 사람 가운데 제아무리 빠른 사람이 결승선에 먼저 들어온다 한들 경기 결과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대중들의 화를 더욱 돋운 건 선수들의 다음 동작이다. 경기가 끝난 뒤 먼저 들어온 두 사람은 인터뷰 과정에서 좋지 않은 경기 결과를 나중에 들어온 동료 탓으로 돌리며 비웃는 듯한 표정을 연출하고 만 것이다. 


ⓒ엑스포츠뉴스


만약 두 사람의 행동이 실제로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은 생각에서 고스란히 옮겨진 것이라면 이 두 선수는 무언가 크게 착각을 하고 있는 것임에 틀림없다. 이번 경기는 개인전이 아닌 말 그대로 팀추월이다. 아무리 개인의 기량이 뛰어나기로서니 이를 팀 전체의 기량으로 승화시키지 못한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들이 입고 있는 국가대표 유니폼 자켓에도 '팀 코리아'라는 글자가 멋드러지게 새겨져있었던 건 바로 앞서의 효과를 배가시키기 위한 장치 가운데 하나일 테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우리 팀 코리아에는 바로 이 '팀' 정신이란 자체가 철저히 결여돼있었던 걸로 보인다. 성난 네티즌들은 이번에도 청와대 국민청원 사이트로 몰려갔다. 김보름, 박지우 두 선수의 국가대표 자격 박탈과 빙상연맹의 엄중한 처벌을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결과는 놀라웠다. 청원에 들어간 지 24시간도 채 되지 않은 20일 오후 그 숫자가 이미 20만을 돌파한 것이다. 청와대 국민청원은 국정 현안과 관련, 한 가지 주제에 대해 30일 동안 20만 명 이상의 국민들이 추천한 청원에 대해 정부 및 청와대 관계자가 반드시 답을 하게 되어있다. 물론 이 청원이 받아들여지든 그렇지 않든 그 결과가 중요한 건 결코 아니다. 다만 우리가 그동안 놓치고 있던 가치를 새삼 깨닫게 하는 상징적인 움직임이기에 그저 반갑게 다가올 뿐이다. 



대중들은 예전처럼 토끼와 거북이 우화를 놓고 거북이가 무조건 잘한 것이라며 치켜세우지 않는다. 되레 토끼를 깨우지 않고 자신만 살겠다며 결승선에 먼저 들어선 거북이를 탓하기 시작했다. 하물며 개인 경주에서조차 토끼를 내차고 혼자 결승선을 통과한 거북이를 탓하는 판국이거늘, 마땅히 팀워크가 발휘되어야 할 팀 코리아 내에서 마치 경주를 벌이듯 지극히 개인적인 행동을 일삼으며 저들끼리만 결승선을 통과한 사실은 대중들을 자극시키기에 충분하다. 잘하든 못하든 동료와 함께 서로를 북돋우며 보조를 맞춰 결승선을 통과하는 아름다운 모습을 원했기에 더더욱 그렇다.


이번 올림픽 경기를 통해 대중들은 우리 선수들을 지켜보며 잘난 토끼 혹은 어떡하든 1등이 되고자 하는 거북이를 바랐던 게 아니다. 1등하는 거북이는 어릴적 교과서와 동화책에서 접한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반대로 대중들은 아무리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도 서로를 도우며 하나가 되어 함께 결승선을 통과하는, 진정한 의미의 팀 코리아를 보고 싶었던 거다. 이번 사태는 빙상연맹의 묵은 관행 내지 선수 동료들 간의 불화 요소 따위를 떠나 우리로 하여금 오랜 동안 잊고 지내온 '나'가 아닌 '우리', 그리고 '혼자'가 아닌 '같이'라는 가치를 새삼 깨닫게 하고 있기에 무엇보다 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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