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접 경험의 즐거움

인간적인 영웅을 그린 판타지 영화 '염력'

새 날 2018. 2. 1. 1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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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운 환경을 극복하고 새로운 레시피를 개발, 20대에 치킨집으로 대박을 터트린 신루미(심은경), 하지만 성공의 단맛에 취해 있기에는 그녀를 둘러싼 환경이 지나치게 까칠하다. 그녀가 세든 시장 내 점포 건물과 주변의 상점들이 재개발로 인해 모두 비워주어야 할 처지, 그렇다면 적어도 권리금 등 제대로 된 보상이라도 이뤄져야 하나 이를 맡은 건설사는 정당한 보상 절차 따위는 생략한 채 용역을 대거 동원, 막무가내로 세입자들을 사지로 내몰기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 루미의 어머니(김영선)가 목숨을 잃게 되고, 이후 세입자들과 건설사의 싸움은 더욱 치열해지는데...



한편 젊은 시절 보증을 잘못 서는 바람에 가족 해체의 아픔을 겪은 뒤 나홀로 독립한 루미 아버지(류승룡)는 은행 경비원으로 근무 중이다. 어느날 등산로에서 약수를 마신 뒤 생각만으로 물건을 움직이게 하는 특이한 능력을 지니게 된다. 이 즈음 루미로부터 아내의 사망 소식을 접하게 되고, 장례식장을 방문하면서 가족과 갈라선 뒤 처음으로 루미와의 만남을 갖게 되는 그다. 이윽고 딸이 처하게 된 뜨악한 상황, 그리고 주변 상인들이 맞닥뜨리게 된 곤란한 처지를 알게 되는데...



전통시장 상가에서 작은 치킨집을 운영하거나 아울러 은행의 경비직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들은 대개 평범한 소시민인 경우가 많다. 루미네 가족이 그러하다. 세들어 있는 건물의 점포는 그들의 삶의 터전이자 꿈을 이뤄가는 둘도 없는 소중한 공간이다. 더구나 루미는 해당 점포에서 큰 성공을 거두어 결코 돈으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귀한 가치를 만들어내던 터다. 이런 상황에서 도시개발을 명분으로 이들의 삶의 터전이 제대로 된 보상조차 없이 하루아침에 용역들에 의해 무참히 짓밟히고 강제로 퇴거 조치된다는 건 누가 보더라도 끔찍한 결과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자본은 무지막지했다. 손에 쇠파이프를 든 채 눈에 띄는 건 사람이든 물건이든 개의치 않고 인정사정 없이 부숴버린다. 이들 용역 역시 알고 보면 세입자들처럼 자본에 의해 고용된 소시민일 뿐이다. 아울러 이들을 뒤에서 조종하며 명령을 내리는, 그래도 조금은 높은 직책에 있는 이들 역시 사실은 자본에 의해 고용된 또 다른 소시민일 뿐이다. 



영화는 도시개발계획에 의해 쫓겨나야 할 처지에 놓인 소시민들과 이들을 쫓아내기 위해 안간힘을 쏟는 자본과의 싸움 속에서 초능력을 갖춘 한 사람이 경제적 약자들 편에 서서 대리전을 치른다는 일종의 판타지적 내용을 그리고 있다. 


영화 속에서의 자본은 평소 생각하던 대로 힘이 막강하다. 공권력을 동원하는 일도, 아울러 자신들의 입맛에 맞도록 사건을 조작하는 일 따위도, 그들에겐 아무 것도 아니었다. 경제적 약자인 세입자들은 힘없이 사지로 내몰리면서도 저항할 수 있는 방법이 딱히 없었다. 자본은 합법을 가장한 범위 내에서 가능한 물리력을 총동원, 온갖 불법 행위를 자행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결국 법과 제도라는 틀안에 갇힌 채 옴짝달싹할 수 없게 되는 건 늘 약자의 몫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세입자들, 공권력과 용역의 물리력이 그들의 숨통을 끊임없이 조여오는 상황, 비록 어설프고 엉성하지만 초능력이라도 발휘하여 저들의 물리력을 막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간절한 바람과 상상력이 감독에 의해 판타지 형태로 스크린 위로 그대로 옮겨진 듯싶다. 세입자들이 일방적으로 짓밟히는 말도 안 되는 현실, 너무도 안타깝고 안쓰러운 마음이 앞서게 되지만, 덕분에 염력을 이용하여 물리력을 물리치는 통쾌한 장면은 그 이상의 카타르시스를 선사해준다. 



류승룡 캐릭터가 지닌 찌질함은 평소처럼 염력을 발휘할 때도 고스란히 반영된다. 어설프기 짝이 없는 초능력으로 사방팔방 부딪히면서 하늘을 날아다닐 땐 뭐 저런 게 다 있나 싶었으나 곰곰이 생각해보니 만일 어벤져스 류의 멋진 영웅들처럼 매끈하게 능력을 발휘했더라면, 현재 영화속 등장인물들이 처한 상황과 류승룡 캐릭터가 갖는 특징 사이의 이질감이 왠지 더욱 벌어질 것 같아 현실성이 많이 떨어졌을 듯싶다. 따라서 서양의 히어로물을 염두에 둔 분들이라면 실망감을 감추기가 어려웠을 법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류승룡 캐릭터는 도시개발이라는 한국적 토대 위에서의 경제적 약자들 앞에 놓인 특수한 상황 그리고 소시민들에게 있어 가장 현실감 있게 다가오는 한국판 히어로임에 틀림없다. 



자본이 동원한 공권력은 철저하게 합법으로 위장하고 있으나 그 뒤에 가려진 무자비한 면모는 결국 자본의 근본 속성을 상당 부분 빼닮았다. 세입자들에게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는 건 순식간의 일이다. 세입자들의 가녀린 몸뚱아리를 향해 쇠파이프와 물대포가 정조준하고, 그 뒤에서는 무지막지한 공권력의 진압 장면을 그윽한 표정으로 바라보면서 만면에 미소를 띄우기 바쁜 자본이다. 바리케이드를 사이에 둔 채 공권력 및 용역 그리고 세입자들이 벌이는 사투는 2009년 이 즈음에 벌어진 용산참사 당시의 끔찍한 장면을 오버랩시킨다. 



영화 속에서의 염력이 현장에서 발휘되었더라면 당시에 불행한 사태를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안타까운 심경이 - 우린 세월호 참사 당시에도 비슷한 심경을 토로한 적이 있다. 거인이 나타나 침몰한 세월호를 번쩍 들어올리는 장면을 상상하면서 말이다 - 오늘날 이러한 판타지 장르의 작품으로 탄생시킨 게 아닐까 싶다. 이렇듯 우리는 불가항력적 상황에서 흔히 초인이 등장하기를 꿈꾸곤 한다. 이번 작품 역시 그러한 소망 내지 바람 따위가 스크린 위로 발현된 것일 테다.


배우들의 열연은 극의 재미를 한껏 끌어올린다. 특히 만화 속에서나 등장할 법한 개성 있는 캐릭터들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용역을 이끌던 민사장 역의 김민재는 잔인하면서도 어리버리한 캐리터의 속성을 잘 살려낸다. 자본의 대리인 격인 그로데스크한 이미지의 홍상무에게 당하던 장면은 우스웠지만 왠지 웃을 수가 없다. 정유미가 담당한 홍상무는 당당하고 통통 튀면서도 그 이면은 잔혹하기 짝이 없는 만화 속 캐릭터 같은 인물이다. 이번 작품에서 가장 눈에 띄는 캐릭터다. 


사회적 메시지를 담고 있어 현실감 있게 다가오는 데다가 인간적이면서 따스한 면모를 지닌, 한국판 영웅을 그린 판타지 장르의 영화다.



감독  연상호


* 이미지 출처 : 네이버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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