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년모임에 참석한 한 친구가 회사 대표에게 사표를 던지고 뛰쳐나왔다. 무슨 배짱이었을까? 친구들은 부러움 반 우려 반의 시선으로 그를 바라본다. 우리 나이에는 어떤 종류의 회사가 됐든 이를 그만둔다는 건 더 이상 경제활동을 하지 않겠노라는 선언과 흡사하다. 사전에 계획되었거나 확정된 이직이 아니고서는 제아무리 뛰어난 능력자라고 해도 우리 또래를 반겨줄 만한 회사가 주변에 존재할 리 만무할 테니 말이다. 여건상 그냥 이유 없이 쫓겨나더라도 이상할 게 전혀 없었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꽤나 많은 액수의 돈을 지출한 듯싶다. 그러나 자식들 교육이나 부모님 부양 등 아직도 돈이 들어가야 할 곳은 수두룩하다. 때문에 나를 비롯한 친구들은 녀석의 사표 얘기를 당연히 농담일 것이라 생각했다. 심지어 다음날 대표한테 찾아가서 "어제는 큰 실수를 했던 것 같습니다. 사표를 한 번만 물려주신다면 회사에 뼈를 묻겠습니다" 라고 말할 게 틀림없다며 킥킥거리기까지 했다.
문득 수년 전 일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절친인 두 녀석이 회사에서의 입지가 약해지거나 경영 상황이 악화되어 더 이상 버티기가 어려웠던 모양이다. 한 녀석은 자신보다 한참이나 뒤늦게 입사한 후배들이 치고 올라오면서 저보다 높은 직급에 올라서게 된 상황이었다. 이를 그저 멀뚱히 바라보고만 있던 친구는 한숨이 절로 나오더란다. 또 다른 녀석은 경기가 좋지 않아 회사의 실적이 악화일로로 치닫고 있었다. 직원들의 다수가 퇴직하는 등 매우 좋지 않은 상황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회사를 그만두어야 할 것 같은 절체절명의 위기 순간이 그들에게 찾아온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 두 친구는 이러한 상황을 여차저차 극복하더니 아직 회사에 잘 다니고 있다. 자존심을 조금 굽히거나 급여가 다소 깎여나가는 한이 있더라도 자신만 바라보고 있을 가족들의 얼굴을 떠올리면서 그래도 회사에 남아있는 게 그나마 최선의 선택이라는 사실을 용케 터득한 덕분이다. 근래 친구들과 두런두런 나누게 되는 화제거리라고는 부모님과 자녀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루거나 노후에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따위들이다. 이제껏 살아온 삶도 그다지 녹록치는 않았으나 앞으로의 남은 삶을 생각하면 더욱 갑갑하기 만하다. 시간이 지날수록 평균 수명이 늘어나는 현상 또한 우리에겐 축복이 아닌 부담으로 다가올 뿐이다.
때마침 통계청이 '한국의 사회동향 2017' 보고서를 발표했다. 여러 자료들이 백화점식으로 나열되어 있었으나 그 가운데 생애주기별 여가와 관련한 조사 결과가 내겐 가장 유의미하게 다가온다. 해당 조사 결과를 간단히 요약하자면 우리 국민들은 젊을수록 여가를 즐기는 데 시간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반면, 나이가 많을수록 경제적인 부담 때문에 여가를 즐기지 못하게 된단다.
생애주기별로 여가에 대한 불만 이유를 조사했더니 청년 세대는 대체로 시간 부족을 압도적으로 꼽고 있었고, 경제적 부담으로 인한 불만족 비율은 상대적으로 낮은 편이었다. 사실 돈도 부족했겠지만, 설령 돈이 많았더라도 절대적인 시간 부족으로 인해 여가를 즐길 수 없는 시기가 바로 이 즈음 아닐까 싶다. 반면 중년을 거쳐 노년기로 접어들수록 여가를 즐길 수 있는 시간 부족 때문에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비율은 크게 줄어드는 반면, 경제적 부담으로 인해 불만을 느낀다는 비중이 다른 것을 크게 압도하고 있었다. 바쁜 시기를 모두 관통하고 시간적으로 여유가 생겼음에도 이젠 돈이 부족한 바람에 그 귀한 여유를 만끽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 그래프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명확하다. 대한민국식 삶의 양태를 압축하여 보여준다. 대한민국에서의 삶은 생애주기별로 놓고 볼 때 어느 연령대이건 간에 관계없이 결코 녹록치 않다. 젊은 시절은 사회에 기반을 잡거나 가정을 꾸리느라 정신이 없는 시기이며, 중년부터는 주거비 부담과 자녀 교육 및 부모 봉양 등으로 인해 가장 많은 지출이 이뤄지는 시기이다. 그러다 보니 이와 같은 통과의례가 어느 정도 마무리된 뒤 문득 정신을 차리게 되는 순간 시간적인 여유가 부쩍 늘었음에도 이제는 경제적인 여유가 따라주지 못하게 된다.
나를 비롯한 친구들이 또 다른 친구의 사표 제출에 놀람과 동시에 이를 한낱 농담 따위로 받아들였던 이유 역시 이 지점에 있다. 아직은 여가를 즐길 만한 시간도 부족하거니와 경제적인 여유는 더더욱 넉넉한 입장이 못되는 게 바로 우리 또래들이다. 오히려 자식들을 비롯한 가족에게 지출되는 비용이 생애주기 전 과정을 통틀어 가장 많이 요구되는 시기가 바로 지금이다. 이러한 처지인 까닭에 친구가 회사 대표에게 과감히 던진 사표가 도무지 실화로 다가올 리 만무하다. 친구의 사표 제출 소식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던 이유이다.
'그냥 저냥' 카테고리의 다른 글
'늙어서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을 기록하려는 이유 (8) | 2017.12.28 |
---|---|
기아차 '프라이드'의 단종 소식이 섭섭한 이유 (10) | 2017.12.23 |
거리에서 사라지는 캐럴이 아쉬운 이유 (6) | 2017.12.17 |
손맛으로 위안을 찾는 사람들 (6) | 2017.11.29 |
임산부석, 작은 배려가 아쉽다 (10) | 2017.11.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