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편린들

재롱잔치 폐지, 환영합니다

새 날 2017. 12. 4. 1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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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모 병원 소속 간호사들이 원치 않는 장기자랑대회에 의무적으로 동원되어 갑질 논란으로 불거진 기억이 있다. 병원장을 비롯한 임직원들 앞에서 젊은 간호사들이 이른바 걸그룹의 히트곡에 맞춰 댄스 장기를 선보이는 자리였는데, 병원 본부측은 전국에 산재한 병원 별로 각기 다른 팀을 꾸려 경쟁적으로 경연이 이뤄지게끔 했다고 한다. 당시 간호사들이 입은 의상과 그들이 선보인 댄스 안무가 가장 큰 논란거리 가운데 하나였다. 언론에 보도된 바에 따르면 병원측은 이들로 하여금 헐벗은 의상을 입게 하고 야릇한 표정과 섹시한 몸짓을 강요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해당 사실이 사회적 이슈로 크게 부각될 수 있었던 건 바로 이러한 연유 때문이다. 아마도 장기자랑의 형태가 현란한 걸그룹 댄스가 아니었더라면, 이번 사례처럼 이슈로까지 급부상하지는 않았으리라 짐작된다. 사실상 이와 비슷한 사례들이 우리 사회 도처에서 일상적으로 벌어지고 있음에도 말이다. 때문에 이번 사례의 경우 섹시 댄스를 추게 했다는 사실보다는 병원 집단의 위계에 의해 강제로 진행된 장기자랑이었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춰 사건을 바라봐야 함이 옳을 것 같다. 



병원장을 비롯한 나이 지긋한 윗분들이 해당 병원만의 오랜 전통이라며 굳이 젊은 여 간호사들의 재롱잔치(?)를 관람해야겠다고 한다면, 이 또한 그들의 취향 가운데 하나일 테니 이를 뜯어 말릴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들인들 취향을 존중 받을 권리가 없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다만 그 과정에서 위계질서 혹은 권위에 의해 개개인의 권리가 무시 당하고 침해 당하는 일이 공공연하게 자행됐다는 사실은 우리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대목이다. 해당 병원은 이러한 현실을 알면서도 애써 외면했거나 혹은 지나치게 가볍게 생각한 게 아닌가 싶다. 안타깝기 짝이 없는 노릇이다. 


물론 윗분의 지시 한 마디면 무조건 이를 따라야 하는 조직의 위계는 비단 해당 병원만의 문제라고 볼 수는 없다. 때문에 단 한 명의 이탈자 없이 특정 조건에 부합하는 모든 간호사들을 장기자랑에 참여시켰을 공산이 크고, 더욱이 다른 팀들 간에 경쟁을 부추겨 자연스럽게 댄스의 품질도 함께 높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중간 관리자는 윗분에게 높은 점수를 얻을 요량으로 열심히 당근과 채찍을 제공해가며 간호사들을 채근했을 것이며, 반대로 우월적 지위에 짓눌리던 간호사들은 좋든 싫든 관계없이 그들이 지닌 모든 에너지를 댄스 연습에 모두 쏟아부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근무시간 외에 행해졌던 연습은 개인의 시간을 빼앗고도 모자를 만큼 혹독하게 이뤄진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 당시 장기자랑 영상을 보면, 그들이 선보인 댄스 실력은 하루아침에 이뤄진 게 아님을 입증시키고도 남는다. 


ⓒ연합누스


이런 가운데 최근 유치원의 연례행사인 학습 발표회, 즉 재롱잔치가 폐지되는 추세라는 기사와 맞닥뜨리게 됐다. 유치원의 상징과도 같은 연례행사의 폐지라니, 이게 도대체 무슨 영문일까? 행사 준비 과정에서 교사도 그렇거니와 아이들이 지나치게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심한 경우 아동 학대 문제로까지 불거질 개연성이 높기 때문이라는 게 그 이유였다. 유아들의 재롱잔치는 앞서 언급한 간호사들의 장기자랑과는 그 성격이 꽤나 판이하다. 하지만 학부모와 유치원 관계자 그리고 지역 유지 등을 자리에 앉혀놓은 뒤 그들 앞에서 무언가를 보여주어야 하는 압박감은 그에 못지 않으리라 짐작된다. 



더구나 유아는 자신들의 의사를 제대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심신이 미약한 상태다. 아이들 저마다 학습 역량 등의 편차가 심한 탓에 세심한 주의와 돌봄이 요구되는 상황에서 재롱잔치의 품질을 일정 수준 이상으로 끌어올려야 하는 교사들이나 이를 따라야 하는 아이들 입장에서는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테다. 그나마 다행인 건 학부모 다수가 원치 않을 경우 아이들이나 교사 모두가 심적 부담을 크게 느낄 수 밖에 없는 보여주기식 프로그램을 폐지해야 한다는 주장이 꾸준히 제기돼왔고, 원장 등 유치원 관계자들의 의식 변화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힘을 얻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나는 이러한 유치원의 재롱잔치 폐지 움직임은 지극히 올바른 방향이자, 긍정적인 신호라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춘 시도라는 점에서 박수를 보내고 싶다. 내가 원한 적 일절 없으나 한국식 교육체계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미션스쿨에 입학, 강제로 찬송가 대회를 준비하고 참여했던 경험이 이후 세대에게는 똑같이 전가되지 않기를 바라는 심정에서라도 더더욱 그렇다. 조직 전체를 위한다는 미명 하에 개인의 권리가 침해 당하고, 일방적으로 희생 당하는 일은 더 이상 없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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