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편린들

모두가 같은 방향만을 바라보는 사회

새 날 2017. 12. 1. 21:47
반응형

최근 개봉한 영화 '기억의 밤'은 IMF가 우리 사회에 가한 충격이 개인들에게 극단적으로 전가되는 이야기를 스릴러 장르 형태로 담아내고 있다. 비단 영화속 이야기처럼 충격적인 결과물이 아니더라도 IMF가 우리 삶에 끼친 영향력은 실로 엄청나다. 절대로 무너질 것 같지 않던, 업계 수위를 달리던 증권회사나 은행 등 거대 규모의 기업이 일제히 문을 닫으면서 소속 직원들은 하루아침에 실업자 신세로 전락하고 만다. 


설마 하며 의구심을 품고 있던 이들조차 외마디도 지르지 못한 채 맞닥뜨리게 된 어처구니없는 현실 앞에서 그저 망연자실한 채 멍하니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던 게 당시 할 수 있었던 일의 전부였다. 시장 지배력이 뛰어난 큰 회사들도 이렇듯 당시 상황을 극복하지 못하고 무너지는 판국이거늘 작은 기업이야 말해 봐야 입만 아플 지경일 테다. 1997년 겨울, 한반도에 급작스레 들이닥친 IMF발 혹독한 시련은 이렇게 시작됐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2017년의 대한민국, 우리는 여전히 그의 그늘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사회 구석구석 영향을 받지 않은 곳이 거의 없다. 그 가운데서도 고용 시장의 변화는 더욱 특별하게 다가온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에서 취업을 바라는 청년들은 한결 같이 안정성을 최고의 덕목으로 꼽고 있다. 그러다 보니 모두가 공무원이나 공기업 직원을 꿈꾼다. 꿈이 무어냐는 질문에 건물주라고 답하는 아이들도 부지기수다. 



노량진 고시촌은 이른바 공시족들로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호황을 누린다. 이러한 현실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사회에 문을 두드려야 할 입장인 특성화고 학생들에게도 결코 예외는 아니다.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아이들이기에 보다 창의적이고 미래 지향적인 일자리를 찾고, 아울러 이를 권유해야 하는 게 취업 담당 교사들의 올바른 역할이라 생각되지만, 현실은 모두가 똑같은 눈높이, 특정 지점을 향해 수렴해가고 있었다. 안타까운 현실이다.


그렇다고 하여 이들을 나무랄 수도 없다. 대한민국에서 살아가야 하는 모든 이들에게 부여된 일종의 숙명과도 같은 현실이기 때문이다. 즉, 언제 회사가 무너질지 알 수 없거나 직장에서 잘릴지 모르는 불확실성과 불안감이 오늘날의 공시족 광풍을 낳고 있는 셈이니 말이다. 이러한 결과는 일찌감치 저성장 시대로 접어든 데다가 미래를 이끌어갈 성장 동력이 고갈된 한국적 특수 상황 하에서 저출산 현상 등 복합적으로 맞닥뜨리고 있는 난관까지 겹치며 우리 사회의 활력을 더욱 떨어뜨린다. 


아무리 많은 청춘들이 공무원과 공기업의 문을 두드린다고 해도 현실적으로 이들을 전부 수용할 만한 수요처는 단언컨대 없다. 노동시장에도 엄연히 수요와 공급 법칙이 적용될 테니 말이다. 한정된 일자리로 인해 수십 대 일, 심지어 수백 대 일의 경쟁을 벌이는 일은 예사다. 결국 그들 가운데 극히 일부만 치열한 경쟁을 뚫고 자신들이 원하는 세계에 발을 들여놓을 테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고배를 마실 수밖에 없는 구조다. 


ⓒ연합뉴스


저성장 기조 하에서 모두가 한 방향을 바라보는 이 기형적인 작금의 취업난은 앞으로도 기대난망일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니 해당 현상은 자연스럽게 아르바이트나 파트타임을 생계 수단으로 삼는 비자발적 프리터족의 숫자마저 불려나간다. 이는 통계 결과로도 입증된다. 지난 7월 아르바이트 사이트인 ‘알바천국’이 회원을 대상으로 벌인 설문조사에 따르면 ‘당분간 취업할 생각 없이 아르바이트로 생활하고 있다’고 응답한 비율이 27.6%에 달했다. 


이는 5년 전인 지난 2012년 11.5%가 동일한 답변을 했던 비율에 비해 2배 이상 늘어난 결과다. 아울러 통계청의 2월 고용동향에 따르면 일주일에 17시간 이하의 일을 하는 초단기 취업자 수는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9.6%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IMF에 의해 광범위하게 드리워진 그늘은 우리 사회 전반에 구조적인 변화를 강요해왔으며, 이는 결과적으로 젊은이들로 하여금 모두가 동일한 꿈을 꾸게 하고 있다. 


이렇듯 현실의 삶이 녹록치 않다 보니 미래를 생각할 겨를조차 없고, 그러다 보니 요즘 세대들은 기성세대가 살아온 방식과는 조금은 다른 양태의 삶을 꿈꾸기도 한다. 소득이 많고 적음을 떠나 자신의 삶을 미래에 저당 잡히지 않고 현재를 충분히 즐기자는 주의인 '욜로' '탕진잼'의 유행은 바로 이러한 현실과 맞닿아 있다. 앞서 살펴본 프리터족의 증가세와도 맞아떨어진다. 그러나 앞으로는 이조차도 만만찮을 것으로 판단된다. 



많은 젊은이들이 제대로 된 일자리를 구할 때까지 대안으로 삼거나 그렇지 않으면 아예 직업으로 선택하게 되는 아르바이트와 파트타임의 일자리 또한 위태로운 건 매한가지이기 때문이다. 기술의 발달이 초단기 일자리마저도 본격적으로 빼앗기 시작했다는 소식이다. 유통가에 무인화 바람이 불기 시작한 것이다. 그 가운데서도 편의점 업계가 가장 공격적이다. 롯데가 업계 최초로 무인편의점을 선보인 데 이어 신세계 이마트24도 시동을 걸고 나섰다. 편의점은 대표적인 아르바이트 수요처다. 때문에 이러한 변화는 자못 심각하다.


하지만 이는 비단 편의점 업계만의 문제가 아니다. 카페나 음식점 그리고 도시락점 등 종업원 없이 운영하는 무인점포는 갈수록 늘고 있다. 인건비가 들지 않아 효율성 측면에서 충분한 메리트가 있기에 무인점포의 확산세가 더욱 빨라지리라는 전망이 힘을 얻고 있다. 이와는 성격이 다소 다르기는 하나, 의류와 화장품, 신선식품 등의 업계도 점포 입점과 인건비가 전혀 필요 없는 자판기를 통한 제품 판매에 나서기로 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모두가 안정적인 직업만을 추구하며 오로지 한 방향만을 바라보다 보니, 관련 노동시장의 수요는 바늘구멍이 되어가고, 그의 반대급부로 사회의 활력은 갈수록 떨어져 간다. 바야흐로 기계가 사람의 일자리를 대체하는 시대다. 생각보다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자칫 양질의 일자리는 물론이거니와 단기 일자리를 놓고도 이를 찾는 사람들끼리 심하게 다퉈야 하는 상황이 도래할지 모를 일이다. 이는 IMF가 다져놓은 토대 위에 20년이라는 시간, 그리고 AI 및 정보통신 등 각종 과학기술의 발달이 덧대어지면서 이뤄놓은 끔찍한 결과물이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