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편린들

명찰은 아무런 잘못이 없지 말입니다

새 날 2017. 4. 14. 1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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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각급 학교엔 사범대학 4년생들이 교육 실습을 위해 파견돼 있다. 그런데 교생들의 가슴에 패용하는 명찰이 갈등을 야기하고 있다는 웃지 못할 소식이 언론을 통해 전해졌다. 명찰은 통상 교생 실습이 이뤄지는 각급 학교에서 운영상 필요에 의해 대학 측에 이를 요구하고, 대학들은 관행적으로 명찰을 직접 제작, 교생들에게 지급해 왔던 것으로 전해진다. 


명찰은 해당 대학을 상징하는 로고와 이름을 함께 기재한 형태가 가장 보편적이다. 명찰만으로도 해당 교생의 출신 대학을 쉽게 인지할 수 있다는 의미다. 따라서 지극히 평범한 형태의 이 명찰만으로는 문제가 될 법한 소지가 별로 없어 보인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명찰이 사회 구성원과 구성원들 사이에서 최근 갈등을 빚게 하는 등 화근이 되고 있다 하니 그저 놀랍고 안타까울 뿐이다. 


ⓒ한국경제


우리 사회를 좀먹고 있는 학벌주의와 서열화의 그늘은 넓고도 깊어 중고등학생, 심지어 초등학생 아이들에게까지 파급된 지 오래다. 왜 아닐까 싶다. 대학은 물론이고, 고교 다양화 정책으로 인한 고등학교 서열화의 폐해가 어느덧 중학교 단위로까지 그 영향력을 행사할 정도로 거세다. 명찰을 통해 출신 대학을 파악한 아이들은 영악하게도 이른바 명문대학 출신 교생에게 더 많은 관심을 드러내기 일쑤이고, 상담 등의 접촉 또한 특정 교생들에게만 인기가 몰리는 등 일종의 쏠림 현상마저 빚어지고 있단다. 


교생과 관련한 과거 경험을 떠올려보면 최근의 이러한 분위기는 많이 낯설다. 교생 선생님이 찾아오는 3, 4월이 되면 그들의 생경하고 날 것 같은 느낌에 괜시리 두근거려지고 왠지 모를 기대감 따위를 품었던 것 같다. 난 요즘 아이들과는 달리 교생 선생님의 출신 학교에는 관심이 없었으며 그들로부터는 기존 선생님들이 지니지 않은 풋풋한 감성과 학생들에 대한 선입견 없는 건강한 모습에 이끌려 모종의 기대감 따위를 키워왔던 것 같다. 아마도 아직 사회물이 들지 않은 학생 신분이라는 사실이 우리를 매료시켰던 게 아닐까 싶다. 


그에 비하면 요즘 아이들은 정말로 똑똑하다. 때로는 지나치게 똑소리가 나는 바람에 혀를 내두르게 하는 경우가 더러 있을 정도다. 입결과 사회 평판 위주로 다져진 출처 불명의 대학 서열을 줄줄 외우고 다닐 정도로 - 이는 이른바 대학 홀리건들이 모종의 목적을 갖고 의도적으로 만들어 퍼트렸으리라 - 요즘 아이들은 이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다. 사실 명찰에 선명하게 박힌 대학 로고가, 예리한 그들의 눈을 피해갈 리 만무했다.



뿐만 아니다. 명찰은 여타의 폐해도 낳고 있다. 혈연 학연 지연으로 촘촘하면서도 끈끈하게 얽힌 사회 관계망이 명찰을 패용한 교생들에게까지 닿으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기존 교사들은 명찰을 매개로 자신과 같은 학교 출신의 교생들에게 접근, 공공연하게 '나랑 동문입네' 하며 유독 학연을 강조하는 경우가 잦단다. 


명찰, 이깟 게 과연 뭐라고 이토록 시끄러운 걸까? 왜 이 녀석 때문에 우리 사회에 잠재돼 있던 고질적인 병폐들이 불쑥불쑥 고개를 쳐들어야 하는 걸까? 그렇다면 명찰이 잘못한 게 분명히 맞는 것 같다. 당장 명찰을 없애자고 하거나 학교 로고를 지우자는 주장이 제기될 법도 하다. 이 모든 게 명찰 하나로 인해 야기된 결과이니 녀석만 없애면 작금의 갈등이 눈녹듯 모두 사라질 것도 같다. 


그러나 난 명찰을 바꾸거나 이를 없애자는 주장엔 극구 반대한다. 단언컨대 명찰은 아무런 잘못이 없다. 명찰은 교생의 출신학교와 이름을 또박또박 명시, 명찰이라면 응당 지켜야 할 고유의 소임을 100% 이상 해내고 있다. 정작 문제가 되는 건 바로 우리 자신이다. 학벌주의와 서열화를 낳고 있는 작금의 사회 분위기가 지금도 세상 모든 걸 줄세우기 하고 있고, 학연 지연 등의 사회 관계망으로까지 이어지게 하는 등 사회가 지닌 모든 병폐의 뿌리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명찰은 단지 그러한 폐해를 드러나게 하는 도구로 활용되고 있을 뿐 아무런 잘못이 없다. 그러니 명찰은 그냥 그대로 놔두자. 정작 바뀌어야 하는 건 명찰이 아닌 우리 자신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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