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저냥

인간 존엄을 지키기 위한 최후의 여정

새 날 2016. 8. 15. 1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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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 죽음을 두려워 한다. 막연한 공포감 때문이다. 이는 다른 경우처럼 살아 생전에 경험을 통해 체득하기가 절대로 불가능한 영역이기 때문이다. 다양한 종교가 만들어져 왔고 많은 이들이 이에 빠져들며 심취하고 있는 이면에는 일종의 죽음이라는 막연한 두려움으로부터 해방되고 싶은 인간의 가장 근본적이면서도 간절한 생존 욕구가 담겨 있기 때문일 테다. 


그런데 이러한 죽음을 맞이하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고 오히려 더욱 즐거운 시간을 보낸 한 여성의 생전 마지막 사진과 사연이 알려져 잔잔한 반향을 불러일으킨다. 그렇다면 죽음을 코앞에 둔 상황에서도 시종일관 웃음을 잃지 않고 끝까지 이를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은 과연 무엇이며, 어디로부터 비롯된 것일까? 아마도 인간으로서 지녀야 할 최소한의 품위를 지키며 죽음을 맞이할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서울신문


미국 캘리포니아 주에 살고 있는 '배치 데이비스'라 불리는 여성은 치명적인 질환을 3년째 앓아 왔다. 운동신경이 점차 파괴되어 가고 굳어져 사지마비는 물론, 병이 진행되면서 결국 호흡근 마비로 수년 내에 사망에 이르게 된다는 루게릭병 때문이다. 현재의 기술로는 이 질환을 완치시킬 수 없다고 한다. 이 질환에 걸릴 경우 누구든 고통의 질곡에서 헤어나올 수 없다.


물론 직접 경험한 경우가 아니기에 뭐라 콕 집어 단정짓기엔 주제 넘는 오지랖일 수 있지만, 사지가 마비되어가는 극심한 고통 속에서 얼마 남지 않은 여생을 보내다 결국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면, 어쩌면 살아 있는 자체가 고통 아니었을까 싶다. 그 고통을 깊이 헤아릴 수 있는 입장이 될 수 없다면 무조건 살아야 한다는 제3자의 참견 역시 결코 올바른 해법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외려 그러한 언행이 당사자에겐 날카로운 비수로 되돌아 와 등 뒤에 꽂힐 수 있기 때문이다.


베치 데이비스는 며칠 전 가족과 친구들에게 파티 초청장을 보냈다. 이른바 생애 마지막 파티인 '임종파티'다. 초청장에는 참가자라면 반드시 지켜야 할 오로지 한 가지 룰만 적혀 있다. 


"내 앞에서 절대로 눈물을 흘리지 말아주세요." 


그렇다. 그녀가 그동안 살아왔던 짧다면 짧은 삶의 여정을 친구 및 가족들과 함께 평소와 다름없는 춤과 노래, 그리고 웃음 등으로 마무리지을 수 있기를 간절히 원했던 것이다. 기쁨과 행복으로 맞이하는 죽음, 우리에게는 죽음이란 늘 검은색 일색의 칙칙함이 먼저 연상되어 오던 터라 너무도 낯선 광경이 아닐 수 없다. 



문득 얼마 전 관람한 영화 '미비포유'의 주인공이 떠오른다. 그 역시 불의의 교통사고로 사지가 마비된 상태였고, 특별히 제작된 휠체어와 타인의 24시간 보살핌을 통해서만 삶을 연명할 수 있었다. 그는 오랜 고심 끝에 결국 스위스의 다그니타스 병원 행을 선택하게 된다. 그가 살던 곳에서는 존엄사가 인정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의 마지막 여정에는 그를 아끼던 가족과 연인 등이 함께한다. 죽음을 맞이하는 여행이었으나 그를 포함한 모두의 표정은 한없이 밝았다. 그 이유는 앞서 사례로 든 배치 데이비스의 경우와 비슷한 성질의 것이리라 짐작된다.


존엄사와 안락사는 그 의미가 사뭇 다르다. 품위 있는 죽음을 뜻하는 존엄사는 치료를 통한 회복이 불가능할 경우 인공호흡기 제거 등 무의미한 연명치료 중단을 통해 자연스럽게 죽음을 맞이하게 하는 소극적인 방식이다. 반면, 안락사는 인위적인 생명 단축을 의미한다. 앞서 소개한 '배치 데이비스'의 경우나 영화 '미비포유'속 주인공의 경우는 사실상 안락사에 해당한다. 존엄사를 보다 큰 범주로 묶을 경우 안락사의 하위 개념에 속하겠지만, 자연스럽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하느냐 아니면 약물 주입 등을 통해 인위적으로 목숨을 끊느냐에 따라 그 의미는 달라지는 셈이다. 흔히들 존엄사를 소극적인 안락사의 범주에 넣곤 하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안락사는 엄격히 금지되어 있다. 다만 소극적 안락사의 범주인 존엄사는 허용돼 현재 시행을 눈 앞에 두고 있다. 이른바 '존엄사법'이 국회를 통과, 2018년부터 시행될 예정이다. 품위 있는 죽음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갈망하는 수많은 이들에게는 여전히 미흡한 결과가 되겠으나 그나마 진일보한 셈이다. 해당 법안은 환자가 의식이 있을 때에는 환자가 직접 이를 요구할 수 있고, 의식이 없을 경우에는 가족이 평소 환자가 연명치료의 거부를 원해 왔다는 뜻을 의료진에게 전달할 수 있다. 이후 치료를 통한 회복이 불가능하다는 의료진의 판단이 내려지게 될 경우 존엄사가 가능해진다.


ⓒ연합뉴스

하지만 '배치 데이비스'가 존엄사를 택할 수 있도록 한 캘리포니아 주의 존엄사법은 시한부 환자가 자신의 생에 대해 마감을 원할 경우 합법적으로 의사로부터 약물을 처방 받을 수 있도록 하는, 우리의 경우와는 달리, 보다 진보적이며 전향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니까 일종의 안락사에 해당한다. 이 법 적용의 첫 사례로써 '배치 데이비스'가 기록된 셈이다.


불과 몇년 전까지만 해도 '웰빙'이 대세였다면, 근래엔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거듭되고 있고, 어느덧 사회적 논의마저 활발해지며 '웰다잉'이 화두로 떠오르고 있는 양상이다. 어쩌면 인간은 사고와 지각이 가능한 유일한 고등동물인 까닭에 죽음이라는 여정도 스스로 택하는 게 충분히 가능할 듯싶다. 물론 생명과 관련한 윤리적인 논란으로부터 절대로 자유로울 수 없는 노릇이나, 오남용을 막을 수 있는 장치가 마련된다면 품위있게 그리고 적극적으로 스스로가 삶의 끈을 놓을 수 있도록 하는 생애 마지막 권리의 부여도 그런대로 참의미가 있을 듯싶다. 


ⓒ서울신문


치매로 자신의 존재나 타인의 존재를 잊은 상황이라면 육체는 남아 있으되 정신은 이미 온전한 한 사람의 것으로 볼 수가 없다. 즉, 육체만 존재할 뿐 그 육신의 주인은 이미 사라진 셈이니 말이다. 반대로 자신의 의지에 의해 몸을 움직이거나 가눌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중증 질병을 앓는 상황이라면 정신은 살아 있으되, 이번엔 육신이 없는 경우와 진배없다. 이들은 비단 시한부의 삶이 아니더라도 이미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지키기가 어렵다. 


철학자들에 따르면 인간은 근본적으로 선하며, 이성적이고 믿을 수 있는 존재라 여기는 시각이 있는 반면, 인간은 선과 악의 잠재력을 모두 지닌 존재라는 시각도 있다. 어떤 제도를 만들더라도 이를 악용하는 사례는 막을 수 없다. 하지만 구더기 무섭다고 하여 장을 안 담글 수 없듯 보다 많은 사람들의 행복과 존엄을 지켜주려는 노력은 끊임없이 추구되어야 한다. 때문에 '배치 데이비스'가 보여준 용기 그리고 마지막 여정에서의 편안하면서도 행복한 표정을 짓는 그녀의 모습에 난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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