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저냥

최고의 발명품은 에어컨이 아니지 말입니다

새 날 2016. 8. 14. 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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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최고의 발명품을 꼽으라고 하면 아주 다양한 답변이 나올 법한데, 모 매체의 오늘자 기사를 보니 '에어컨'을 꼽고 있었다. 날씨나 기후에 상관없이 일의 효율을 높일 수 있기 때문이라는데, 일견 그럴 듯해 보이는 논리이다. 일찍이 싱가포르의 고 리콴유 총리가 '20세기 최고의 발명품은 에어컨이다' 라고 언급한 데서 비롯됐다고 한다. 물론 그분의 말씀처럼 에어컨이 대단한 발명품임은 부인하기 어렵다. 


하지만 적어도 우리나라에서만큼은 에어컨을 최고의 발명품이라며 마냥 떠받들 수는 없을 것 같다. 낡아빠지고 비합리적인 전기요금체계로 인해 전국 가정에 설치한 에어컨의 다수가 제 역할을 하고 있지 못 하기 때문이다. 우리집이라고 하여 별반 다르지 않다. 덕분에 찜통 더위가 맹위를 떨치고 있음에도 전기요금 폭탄이 두려워 에어컨을 켜지 못하는 다수의 국민들이 이의 개편을 요구하고 나선 상황이다. 


ⓒ한겨레


그러나 정부는 국민을 원숭이로 알고 있는 건지, 아니면 정말로 개 돼지로 취급하는 탓인지는 몰라도, 한시적으로 누진제 완화라는 황망한 방안을 내놓고 말았다. 흡사 '언 발에 오줌누기'와 다름없는 지극히 미미한 수준이 아닐 수 없다. 절기상 입추가 이미 지났으니 어쨌든 더위는 곧 물러날 테고, 냄비 근성의 국민성을 역이용하기로 작정하기라도 한 듯한 정부가 '이 또한 지나가리니' 하면서 배수진을 친 모양새다. 


이러한 마인드를 지닌 정부 관료와 정치인들이 여전히 건재한 이상 절대로 우리나라에서만큼은 에어컨을 최고의 발명품이라며 떠받들 수가 없다. 오히려 비싼 요금 때문에 되도록이면 에어컨의 사용을 자제하게 되는 셈이니, 어찌 보면 떠받듦의 또 다른 양태라 할 수 있겠지만 말이다.


난 되레 에어컨보다는 세탁기가 최고의 발명품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든다. 만약 세탁기가 없었더라면 오늘날의 여성들은, 물론 남성일 수도 있다, 새누리당 김무성 전 대표가 최근 손빨래를 통해 서민 코스프레를 보여주었던 것처럼 가족 구성원의 빨래에 매달리느라 하루 24시간이 부족했을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의생활은 점차 고급화 다양화 추세로 흐르고 있고, 게다가 패션이나 디자인이 의류 선택의 가장 중요한 선택 가늠자가 된 이래 패스트 패션마저 유행하고 있는 상황, 주체하기 어려울 만큼 많은 종류의 옷들이 시중에 쏟아지고 있다. 이들을 세탁기 없이 일일이 손빨래한다고 가정한다면 얼마나 끔찍한 느릇이겠는가.



이는 국가 경제에도 심각한 타격을 줄 개연성이 높다. 여성들이 죄다 빨래에 매달리다 보면 비단 임신 출산 등의 사유만이 아니더라도 경제 활동에 참여할 수 없게 되어 경력 단절 현상을 빚을 테고, 그나마 근래엔 아이들을 일정 나이가 될 때까지 양육한 다음 다시 사회로 복귀하여 산업 역군으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 온 상황인데, 지금처럼 자동으로 빨래해 주는 기계가 없었더라면 이 모두는 언감생심에 불과할 테니 말이다.


모두가 알다시피 여성의 경제활동참가율과 연령을 각기 세로축과 가로축으로 하여 그래프를 그리게 될 경우, 현재는 출산 육아 등으로 인해 20대 후반부터 30대 초반에 이르러 급격하게 올라가던 그래프의 기울기가 푹 꺼졌다가 40대 이후에 다시 올라서는 M자형으로 그려지게 된다. 하지만 세탁기가 없었더라면 M자형은 고사하고 아마도 아주 가파른 역U자형의 형태가 되지 않을까 싶다. 그러니까 여성경제참가율의 정점은 대략 앞서의 M자형과 같을 테지만, 이후로는 급격한 내리막만을 보일 것이라는 의미다.


우리나라의 생산가능인구는 올해를 정점으로 하락세로 돌아설 예정이다. 실질적인 경제성장률은 고작 2%대에 머무르고 있고, 세계에서 가장 낮은 수준인 합계출산율 1.2명의 초저출산율을 보인다는 점도 앞으로 나아가려는 우리의 발목을 제대로 잡는 형국이다. 그나마 여성의 경제참가율이 근래 크게 늘고 있음에도 이러한 믿기 어려운 결과를 빚고 있는 건, 향후 우리 앞에 전개될 미래가 결코 녹록지 않을 것임을 시사한다.


ⓒ뉴스1


세탁기가 없었다고 가정해 보자. 여성들은 하루종일 손빨래에 매달리느라 경제 활동은커녕 쪼그린 채 일을 해야 하기에 멀쩡하던 허리마저 병이 도질 가능성이 높고, 개인 여가 시간은 거의 못 쓰게 될 공산이 크다. 이런 상황에서 가사 분담이라는 시대적 사명감을 띤 일부 바깥분들께서 아내의 일손을 조금이라도 거든답시고 손빨래를 돕거나 그도 아니면 아내가 손빨래를 하며 놓치게 된 다른 작업을 돕지 않을 수가 없을 테다. 그러다 보면 아내나 남편 그리고 가족 구성원 모두의 삶의 질이 형편 없어질 가능성 100%다.


그렇다면 가사 노동, 그것도 굉장히 힘들면서도 시간이 많이 소요되는 빨래로부터 주부들을 해방시켜 여성의 경제참가율을 높이거나 그와 대체 관계에 놓인 여가를 즐길 수 있게 만든 건 결국 세탁기라 불리는 놀라운 제품 때문이다. 세탁기가 20세기 최고의 발명품이라는 데엔 이견이 있을 수 없다. 에어컨 따위는 다른 국가에서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우리나라에서처럼 가정의 값비싼 장식품으로 전락하게 된 상황이라면 절대로 최고의 발명품이라 말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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