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저냥

스스로에게 건네는 조촐한 위로

새 날 2016. 8. 13. 1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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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위가 맹위를 떨치고 있다. 해가 갈수록 짐짓 독해지는 느낌이다. 과거에 비해 여름을 나는 일이 더욱 힘에 부치니 말이다. 지난 주말부터 주초에 이를 때까지 적어도 이 시기가 올 여름 더위의 정점인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는 커다란 착각이었다. 의외로 그제 어제 그리고 오늘의 기온 역시 만만찮다. 그나마 아침 저녁으로 간간이 불어오는 바람의 흔적이 이 더위도 거의 끝물임을 알리는 신호로 다가오는 터라 천만다행스럽다.   


이런 날씨에는 신체의 항상성을 유지하거나 평상시와 다름없는 생체 리듬을 갖추는 일조차 버겁다. 웬만한 의욕은 쉽게 사라지거나 꺾이기 마련이다. 시원한 음료만 연신 찾게 되고 몸은 축 늘어진 채 자꾸 졸립기만 하다.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은 그야말로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개인적으로 마무리지어야 할 일들이 시급함에도 불구하고 몸이 먼저 퍼져 버리니 머리는 자연스레 몸을 따르며 어느새 거의 개점 휴업 상태에 이르고 만다. 큰 일이 아닐 수 없다. 어떡하든 다독이고 스스로를 북돋아, 심신을 정상 상태로 끌어올려야 할 텐데 말이다. 


몸도 몸이지만 머리만이라도 따로 떼어내는 일이 가능하다면 어디론가 피신시키고 싶은 마음 굴뚝 같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어느 것 하나 내게 온전히 허락된 건 없다. 축 늘어진 몸과 마음은 제대로 되는 일 하나 없는 나의 주변 상황을 더욱 갑갑하게 만드는 주된 요인이다. 중요한 일정이 코앞으로 다가왔건만 외려 마음은 점차 느슨해지면서 이완되는 묘한 경험을 하게 된다. 단단히 미친 셈이다.


휴가 기간 동안에도 찜통 같은 집 주변으로부터 단 한 발자욱조차 벗어날 수 없음이 현재 내게 주어진 처지이자 기꺼이 감내해야 할 운명이라면 운명이다. 우리집 주변은 효율성을 극대화하느라 새로이 건축된 건물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전형적인 서민 주택 밀집 지역이다. 이는 가뜩이나 열악한 주거 환경을 더욱 악화시키는 주범 중 하나다.



그런데 집 구석구석을 서성거리던 와중에 난 우연히 특정 공간에서 기시감 같은 것을 접했다. 더위가 집어삼킨 주택가의 오후는 더없이 한가롭고 고요했다. 주변에는 사람 하나 없고 주차된 차량들만 덩그러니 세워져 있는, 마치 시간이 정지되기라도 한 양 사뭇 적막한 느낌마저 준다. 담벼락, 빨간 벽돌로 지어진 옛건물, 그리고 골목길, 그나마 바람길이 뚫려 있어 그로부터 불어오는 공기의 흐름은 아스팔트가 뿜어내는 독한 열기를 잔뜩 품은 예의 그 뜨거운 여름 공기가 아닌, 제법 신선한 바람이었다. 여름 오후를 관통해 가는 시간적 배경이 이와 맞물리니 늘 접하는 공간이지만 왠지 색다른 장소처럼 와닿는 신비한 경험이 아닐 수 없다.



이 순간 어릴적 동네 친구들과 함께 뛰어놀며 재잘거리던 골목길이 문득 떠올라 오버랩되는 건 왜일까? 언젠가 여행길에서 한번쯤 만났을 법한 고즈넉한 공간이 연상되기도 한다. 혹은 흑백사진 속 아스라한 장면들이 왠지 이곳에 와 머무는 듯싶기도 하다. 난 순간 숨을 멈춘다. 그리고 다시금 찬찬히 주변을 살핀다. 다른 곳은 햇빛에 달궈져 열기를 잔뜩 뿜어내고 있었으나 적어도 이곳만큼은 그의 영향으로부터 한 발자욱 비켜나 있다. 우리집에 이러한 공간이 있다니, 까닭 모를 안도감이 밀려든다. 아직 일주일 가량의 시간이 남았다. 그래, 다시 힘을 내자. 


살갗에 닿는 저녁 바람이 제법 선선하다. 밤마다 들려오는 귀뚜라미 울음소리는 날이 갈수록 더욱 옹골져가는 느낌이다. 한없이 길 것만 같던 해의 길이도 근래 부쩍 짧아졌다. 그렇다면 곧 떠나갈 여름이 마지막 에너지를 쏟아붓느라 그 열기를 더욱 뜨겁게 달구고 있음이리라. 이제 그도 곧 끝물일 테니 가을이 저만치 와 있음을 직감한다. 그래, 다시 한 번 힘을 내는 거다. 힘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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