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편린들

'평화의 소녀상' 이전은 어불성설이다

새 날 2015. 12. 30. 1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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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가 공식 제기된 지 24년 여 만에 한일 양국이 해결 원칙에 전격 합의했다. 이번 합의안에는 일본 정부가 위안부 동원의 책임을 공식 인정하고, 일본 정부 예산으로 피해 할머니 지원 사업을 약속하겠노라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이와 같은 합의 내용은 그간의 아베 정권의 태도에 비춰볼 때 진일보한 결과임엔 틀림없다. 그렇다면 이번 합의를 통해 그동안 걸림돌이 돼왔던 문제들을 깨끗이 해소함으로써 한일관계에 새로운 전기가 마련될 수 있을까?

 

그러나 이번 합의의 후폭풍이 심상치 않아 보인다. 일본의 입장은 차치하더라도 우리 내부의 상황은 분노 및 혼돈 그 자체다. 피해 할머니들은 물론 정대협 등 시민사회가 반발하고 있는 데다 수위 또한 그 어느 때보다 강경하다. 심지어 정치권에선 정부가 사과하고 재협상에 나서야 한다는 주장까지 제기됐다. 심상정 정의당 대표는 “역사를 정치화한 미숙함이 불러온 외교 참사다. 박근혜 대통령은 부당하고 굴욕적인 협상에 대해 사과하고, 재협상에 나서라”고 촉구했다.

 

ⓒ한국일보

 

협상에 임했던 정부의 섣부른 태도가 도마 위에 올랐다. 우선 정부가 한일관계 50주년이라는 상징성을 지나치게 의식한 나머지 연내 타결이라는 성과주의에 매몰되어 정작 가장 중요한 본질을 놓친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갖게 만든다. 피해 당사자들의 입장에서는 그 어떠한 당근책을 내놓더라도 그들의 아픔과 상처를 치유하기엔 턱없이 부족할 수밖에 없는 처지임에도, 이번 합의는 그러한 수준을 넘어 어느덧 분노로까지 이어지도록 하고 있다. 정부가 피해 할머니들과 소통하며 의견을 청취한 뒤 이를 기반으로 협상에 나선 게 아니라 일방적으로 합의해 놓고, 거꾸로 피해 당사자들을 설득하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역대 정부가 같은 사안에 대해 줄곧 법적 책임을 강조해왔음에도 이번 합의에서는 일본의 법적 책임을 인정하지 않은 데다 일찌감치 최종적이며 불가역적 해결이었노라 선언하고 말았다.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 인정과 법적 배상을 줄곧 요구해온 피해 할머니들이 “피해자들과 국민의 바람을 철저히 배신한 외교적 담합”이라며 강력 반발하고 나선 건 다름아닌 이러한 연유 탓이다.

 

우리 정부는 일본 정부의 소녀상 철거에 대한 요구에 대해 그동안 민간 차원의 일이라는 입장을 고수해왔으나, 28일 한일 공동기자회견에서는 “관련 단체와 협의를 통해 적절히 해결하도록 노력한다”며 그간의 태도를 180도 바꿨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대목이다. 정부의 이러한 태도는 일본이 소녀상 이전을 기정사실화하며 당장 소녀상의 조기 철거를 우리 정부에 요구해오는 빌미를 제공하고 있다.



아울러 언론보도에 따르면, 일본 정부가 한국과의 위안부 문제 협상과정에서 소녀상 철거를 전제로 위안부 피해자 지원금 10억 엔을 지원할 방침임을 피력한 것으로 전해졌다. 만에 하나 이러한 일본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그동안 줄기차게 소녀상의 철거에 간여할 수 없다는 입장을 견지해오던 정부가 이번 협상에서 돌연 태도를 바꿈으로써 결국 소녀상과 10억엔을 맞바꾼 셈이 되고 만다. 난 우리 정부의 주장처럼 이러한 일본의 주장이 사실을 기반으로 하지 않은 단순 언론 플레이에 그쳤으면 하는 바람이다.

 

물론 국가를 상대로 하는 협상에서 우리의 주장만을 오롯이 관철시킬 수는 없는 노릇일 테다. 때문에 치밀한 외교 전략이 절실히 요구되어지는 것일 테고, 철저한 국익의 관점에서 얻을 수 있는 건 얻고 때로는 버릴 수 있는 건 과감히 양보해야 함이 옳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이번 합의 내용은 정부의 주장과는 달리 전적으로 일본의 페이스에 말려든 기색이 역력하다. 아울러 이번 협상에서 우리가 가장 핵심 가치로 받아들여야 하는 대목은 다름아닌 일본의 진정성 여부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과거보다 분명 진일보한 합의라는 평가도 있긴 하지만, 몇 가지 측면에서 볼 때 전혀 그렇지 못한 까닭에 앞으로의 한일관계에 대한 전망마저 어둡게 하는 요소가 아닐 수 없다.

 

아베 총리가 우리 정부에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사과와 유감을 표명한 날이자 한일 외교장관회담을 통해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타결됐던 28일 당일 아베 총리의 부인인 아키에 여사가 야스쿠니신사를 전격 참배했다. 아울러 역사의 상징물인 평화의 소녀상 철거를 한국에 요구하며 심지어 그 조건으로 10억엔을 들고 흥정을 시도해온 일본이기도 하다. 법적 책임 회피도 물론 심각하긴 하지만, 내가 볼 때엔 그보다 일본의 진정성을 의심케 하는 이러한 일본인들의 태도가 더욱 심각한 사안이 아닐까 싶다. 총리의 사과와 동시에 뒤에서는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하고, 입으로는 자신들의 과거사를 반성한다고 하면서도 그의 상징인 소녀상 철거를 주장하는 그들의 이중성은 진정성 있는 자세와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헤럴드경제

 

일본이 진정으로 과거사의 과오에 대해 사죄하고 반성하는 입장이라면 적어도 소녀상을 철거하거나 이전해 달라는 주장을 해서는 안 된다. 이는 이율배반적 행태이자 어불성설이다. 독일의 사례를 들 필요성조차 느끼지 못할 만큼 어이없는 결과에 불과하다. 진정한 사과와 참회를 전제로 한다면, 오히려 '평화의 소녀상'을 매개로 부끄러운 과거를 통감하고 일본 국민들이 그에 대한 책임감을 절실히 느낄 수 있도록 해야 함이 옳지 않을까? 일본은 이번 합의를 통해 반성과 참회보다 되레 과거사를 전혀 없던 사실로 둔갑시키거나 지우고 싶은 속내를 여실히 드러낸 게 아닐까? 

 

소녀상은 비단 일본뿐 아니라 우리 자신 때문에라도 철거나 이전 대상이 되어선 절대로 안 된다. 소녀상은 우리로 하여금 각성제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도 남는다. 모든 세대가 적재적소에 위치한 살아있는 역사적 상징물을 바라보며, 자성과 반성의 계기로 삼을 수 있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히려 우리 정부는 이러한 소녀상의 이전 가능성을 일본 정부에 시사하고 나섰으니 이를 어찌하면 좋을까 모르겠다. 정말 어처구니없는 노릇이 아닐 수 없다. 때문에 다른 건 모두 차치하고 피해 할머니와 아픈 과거의 상징인 소녀상의 이전 운운만으로도 이번 합의는 결국 실패작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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