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선 포스팅(한 의대생이 쓴 대자보에 내가 공감하는 까닭)을 통해 한 의대생이 지난 14일 광화문 집회와 관련하여 쓴 대자보에 대한 짤막한 감상평을 남겼는데요. 뒤늦게 포털을 검색하다 우연한 기회에 관련 기사에 달린 댓글들을 접하게 되었습니다만, 그 성향을 대충 분석해 보니 어림잡아 세 종류의 패턴으로 나누어지는 듯싶습니다. 우선 소신있게 행동한 의대생의 용기를 칭찬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고요. 어디선가 우루루 원정을 온 것인지 아니면 정신 상태가 그다지 좋지 않은 사람들만 때마침 몰려든 건지는 알 수 없어도, 아울러 무얼 잘못 먹은 건 아닌지 의심스러울 만큼, 마냥 비아냥거리며 그의 행동을 비난하는 사람들을 의외로 많이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댓글들은 익히 예상됐던 대목이고요. 제 시선을 확 잡아끌었던 건 사실 그와는 전혀 다른 시각의 댓글이라 말할 수 있겠는데요. 다름아닌 선배들도 그리 해왔던 것처럼 적당히 현실과 타협할 줄 알아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은 학생의 적절치 못한 행동을 지적하며 앞으로 의사를 할 수 없게 될 현실을 지레 걱정하고 나선 사람들입니다. 심지어 아직 졸업하지도 않은 학생 신분에 불과한 그에게, 의사라는 직업인으로서의 자격을 벌써부터 상실하기라도 한 양 아깝다거나 정신 나간 행동이라는 반응을 보인 이들도 있었습니다. 참 오지랖이 광활한 사람들 같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학생이 쓴 대자보 내용은 전혀 새로울 게 없는,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져야 함이 옳습니다. 당연한 사실을 대자보의 형식을 빌려 발현시켜야 할 정도로 열심히 뒷걸음질 치고 있는 우리 사회의 현재 모습이 그저 암울할 따름이지요. 대자보를 쓴 행위에 대해 용기 있는 행동이라는 반응 일색인 현상은 우리 사회의 상태가 얼마나 옳지 못하며 상식적이지 않은가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일종의 가늠자 역할을 합니다. 물론 그의 행동을 용기 있다며 북돋워주고 칭찬해주는 댓글은 그나마 바람직한 현상입니다. 비아냥거리거나 사이코패스적 성향의 악성 댓글들이 주를 이루는 탓입니다.
선후배라는 상하관계가 그 어떤 조직보다 중요하게 받아들여지는 탓에 단 한 차례라도 눈 밖에 나게 될 경우 쉽게 자리를 잡기 어렵다는 의대생들만의 특수한 직업적 환경을 고려한 때문인지 그의 소신에 대한 칭찬보다는 안위를 걱정하고 있는 모습이 일견 학생을 위한 것처럼 보일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우리 사회가 왜 자꾸만 과거로 퇴행하고 있는가를 여실히 증명하는 잣대 역할을 하는 터라 개인적으로는 참 많이 씁쓸합니다. 대자보를 쓴 학생처럼 생각하며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이 우리 사회에 넘쳐나고 이를 지극히 상식적으로 받아들여야 정상적인 사회가 될 법한데, 이젠 이러한 행위마저도 용기 있는 행동이라며 칭찬해야 하는 현실인 탓에 우리 사회의 수준을 어림짐작케 하고도 남습니다.
강신명 경찰청장은 23일 광화문 집회 관련 현안보고를 위해 국회 안행위 전체회의에 출석한 자리에서 경찰의 물대포 직사로 중태에 빠진 백남기 씨와 관련하여 "인간적인 면에서는 굉장히 안타깝기에 쾌유를 빌고 싶지만, 인간적 사과와 법률적 사과는 엄연히 차원이 다른 문제"라며 이른바 법률적 사과를 거부하고 나섰습니다. 이게 무슨 말인가요? 사과에 무슨 인간적인 사과와 법률적인 사과의 구분이 필요한 걸까요?
한 사람의 목숨이 달린 사안을 두고 사과를 하면 한 것이고 안 하면 안 하는 것이지 여기에 무슨 인간적인 것과 법률적인 것 따위로 형식을 가르며 사과를 한다는 것인지 참으로 비겁한 사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쨌거나 자신의 지휘 아래 벌어진 불상사라면 이유 불문한 채 일말의 책임에 대해 그냥 사과를 하면 될 일을 이게 무슨 해괴망측한 행동일까요? 이런 결과를 놓고 볼 때 폭도들은 모두 죽여야 된다는 등의 마치 사이코패스를 연상케 하는 거친 댓글들이 해당 기사에 줄줄이 달리고 있는 끔찍한 현실이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합니다.
며칠 전엔 수사기관이 일베가 요구했다면서 다친 백남기 씨를 도와주고 라디오 인터뷰에 응했던 사람에 대한 신병을 요구했다는 소식을 접한 바 있습니다. 일개 인터넷 커뮤니티에 불과한 일베의 영향력이 이렇게까지 지대할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이쯤되면 사회가 제대로 미쳐 돌아가는 느낌이 아닐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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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기성세대들이 오늘날 현실과 적절히 타협하거나 불의를 보면서도 외면해 버리는 매우 비겁한 세상을 만들어 놓은 채 후배들의 의로운 행동에 대해 정신 나갔다고 하거나 현실과 타협할 줄 모르는 멍청이 같은 학생이라는 표현 따위를 일삼고 있는 건 정말로 최악의 꼴불견이자 역겨운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마치 나이 먹으면 무조건 그렇게 변하는 게 당연하다며 개거품을 문 채 자기 합리화하던 이들의 면면이 떠오르는 느낌입니다.
뭐라고 말할 자격도 없는 사람들이, 시쳇말로 흔히 꼰대라고 하지요, 후배들에게 또 다시 자신들처럼 비겁해지라고 말한다면 우리 사회는 과연 진보할 수 있을까요? 오늘날 우리 사회의 퇴행이 괜한 게 아님을 직접 증명하기라도 하겠다는 것인가요? 어찌 보면 매우 사소한 일 같지만, 이러한 현실이 우리의 과거와 미래의 모습을 고스란히 투영시키고 있기에 저로선 적잖이 불편하게 다가옵니다. 어느 누구도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안타깝게도 우리 사회의 퇴행은 이렇듯 다양한 영역에서, 여러 방식을 통해 동시다발적으로 이뤄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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