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저냥

한 의대생이 쓴 대자보에 내가 공감하는 까닭

새 날 2015. 11. 23. 1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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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의대생이 지난 14일 광화문 집회와 관련하여 쓴 대자보가 온라인에서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해당 대자보에는 자신이 14일 집회 현장에서 경찰이 호송되고 있는 환자와 열려져 있는 구급차 뒷문 안을 향해 최루액이 담긴 강한 수압의 물대포를 직사하는 끔찍한 광경을 직접 목격하고, 인류가 이뤄온 합의와 생명의 무게를 짓밟는 죄악에 대해 재발하지 않도록 의료인들이 목소리를 높여달라는 주문과 함께 의료의 존엄을 위해 함께 행동하자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해당 의대생이 집회 현장에서 직접 목격했다는 그 광경은 일찍이 언론을 통해서도 보도된 바 있습니다. (부상자 싣는 구급차도 정조준 11월 14일 물대포는 '살의'였다  오마이뉴스 기사) 당시 들것에 실린 사람은 팔이 부러진 위중한 상태였고, 구급차 안으로 반쯤 들어간 들것을 의료진들이 마저 밀어 넣으려는 순간 물줄기가 그들을 향해 똑바로 날아들었다고 합니다. 경찰이 구급차의 열린 뒷문을 정확히 조준하여 물대포를 직사한 것입니다. 깜짝 놀란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며 구급차 뒤쪽을 에워쌌지만 물줄기는 여전히 멎지 않았다고 합니다.

 

ⓒ민중의소리

 

비단 팔이 부러진 이분의 사연이 아니더라도 물대포에 맞아 현재도 중환자실에서 사경을 헤매고 있는 농업인 백남기 씨의 쓰러지던 순간과 이후 그를 도우려던 주위 분들에게까지 쉴 새 없이 날아들던, 물대포의 물줄기가 그려내는 참혹했던 포물선의 궤적을 전 결코 잊을 수가 없습니다. 쓰러진 백남기 씨 주변은 마치 눈이 쌓인 양 온통 새하얬습니다. 물에 섞인 최루액 성분 탓입니다.

 

ⓒ민중의소리

 

학생은 들것에 실린 환자와 이를 호송하고 치료하는 의료인을 공격하는 것은 전쟁터에서도 용서받을 수 없는 범죄 행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환자를 보호하거나 치료와 관련한 사안은, 그가 어떤 사상을 가졌는지, 어떤 종교를 가졌는지, 혹은 그가 악인인지 선한 사람인지, 범죄자인지 아닌지 따위가 중요한 것이 아니며, 심지어 시위 참가자의 위법 여부나 경찰의 과잉 진압 문제와도 절대적으로 별개인 까닭입니다. 장소가 어디이고 상황이 어떤지와 상관없이 무방비 환자와 의료인을 공격하는 것은 인류가 애써 이뤄온 합의와 생명의 무게를 짓밟는 죄악에 해당한다라는 것이 바로 학생의 논리입니다.

 

전 어느 누구보다, 폭도에게는 무관용이 원칙이라고 말하며 마구잡이식 진압에 나선 경찰과 이러한 행태에 호응하고 있는 일부 세력이, 이 학생이 쓴 대자보를 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번 집회 참가자들이 혹여 경찰이 주장하고 있는 바와 같이 폭도라고 가정해 봅시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진압 과정에서 부상을 당한 사람을 병원으로 이송하기 위해 구급차에 싣는 순간조차 최루탄이 섞인 물대포를 쏘아대는 건 그야말로 야만적인 행위에 불과합니다. 부상자를 들것으로 옮기던 사람들은 모두 의료진들일 텐데, 이들에게마저 물대포를 퍼부어대는 건 인간이 갖춰야 할 가장 기본적인 것들을 망각한 행위인 탓입니다.



얼마전 미국의 아프간 폭격으로 인해 의료시설이 파괴된 사건이나 IS에 대한 응징 차원에서 이뤄진 러시아의 시리아 폭격 당시 일부 의료시설이 파괴된 사실에 대해 세계인들이 격한 분노를 토해내고, 또한 무수한 비난이 쏟아졌던 이유를 우리 경찰이라고 하여 절대로 모를 리 없을 겁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는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인종, 국적, 종교, 사상 여하를 불문하고 모든 인간은 오직 인간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동등한 자격을 갖추고 있습니다.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한 의료인들은 때문에 전쟁터가 됐든 아니면 시위 현장이 됐든 환자가 있는 그 어느 곳이건 간에 그들을 보호하고 치료하겠노라는 의무를 다하기 위해 달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분들에게 웬 물대포 세례가 퍼부어져야 할까요? 제아무리 급박한 상황이라 해도 사람이 다쳤고, 그를 보호하거나 치료하기 위한 행동이거늘, 왜 최루액 섞인 물대포를 쏘아야만 했을까요? 물대포라는 무기가 손에 쥐어지니 어느새 한 사람 한 사람의 가치가 그렇게도 보잘 것 없게 여겨지던가요?

 

저는 대자보를 쓴 학생이 말하고 있듯 하물며 전쟁터에서조차 인도주의적인 조치들이 취해지고 있는 판국인데, 우리 사회에서는 단순히 시위를 벌이고 또 이를 막는 상황에서조차 이렇듯 반인도주의적 행위들이 만연하고 있는 현실이 개탄스러울 뿐입니다. 더욱 안타까운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찰의 태도가 되레 강경해지고 있다는 대목이 아닐까 싶습니다. 자신들의 행위에 대한 반성은커녕 앞으로 예정된 집회나 시위에서도 일관된 자세를 견지하겠다고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의사가 되기 위해선 누구나 자신의 생애를 인류 봉사에 엄숙히 바칠 것이며, 환자의 생명과 건강을 첫째로 여기고 그들에 대한 의무를 다할 것이라는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해야만 합니다. 의료인이 되기 위해 공부를 하고 있던 학생의 눈엔 학교에서 배웠던 내용과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사건 사이에서 메울 수 없는 커다란 간극이 확인됐을 테고, 이러한 안타까운 현실을 바꿔보자는 취지에서 해당 대자보를 썼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가 또박또박 손글씨로 적어내려간 글은 그래서 더욱 의미있게 다가오며, 공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글귀 한 구절 한 구절로부터는 따뜻한 사람의 온기가 뚝뚝 묻어나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인종 종교 국적 정당 정파 또는 사회적 지위 여하를 초월하여 오직 환자에 대한 나의 의무를 지키겠노라"며 히포크라테스 선서 일부를 인용한 채 대자보를 마무리지은 학생의 노력과 열망이 결코 헛되이 되지 않도록 다시는 비슷한 일들이 반복되지 않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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