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신해철 씨의 아내 윤원희 씨는 23일 이른바 '신해철법('의료사고 피해 구제 및 의료 분쟁 조정 등에 관한 법률' 개정안)'의 심사를 촉구하는 청원서를 국회에 제출했다. 해당 법안은 의료사고 피해자가 한국의료분쟁조정중재원에 분쟁 조정을 신청할 경우 피신청인의 동의 여부와 관계없이, 즉 의료기관이 조정을 거부하더라도, 자동으로 조정이 개시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존재감조차 희미해져가던 의료분쟁조정법 개정안은 지난해 고 신해철씨의 죽음으로 재차 주목 받으며, 한국의료분쟁조정중재원의 조정 및 중재 개시 절차에 대한 문제점이 제기되면서 이를 개선하기 위한 새누리당 김정록 의원의 대표 발의로 이어진 바 있다.
하지만 고 신해철 씨의 1주기가 훌쩍 지난 현재, 해당 법률 개정안은 정기국회 마지막 회기인 이번달 보건복지위 법안심사소위 안건에조차 오르지 못하는 등 실상 모두의 관심으로부터 멀어져 갔다. 자칫 자동폐기라는 운명에 놓일 뻔한 신해철법, 다행히 이번 청원 덕분에 일단 내년 2월까지 그 생명을 연장하는 데는 성공한다. 물론 지난해에도 해당법 개정안이 발의돼 복지위에 상정된 바 있으나 쟁점 법안에 밀려 처리되지 못했던 사례가 있는 데다, 의료계의 반발도 무시할 수 없는 처지라 개정법안 통과를 쉽사리 예단하기란 녹록지 않은 상황이다. 모두의 관심이 필요한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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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 분쟁은 생각보다 잦다. 이는 유명무실한 의료분쟁조정제도 탓에 쉽게 결론이 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해 으레 의료 소송으로 이어져 이의 건수가 해마다 늘고 있는 추세이며, 한 해 1,000건이 넘은 지는 벌써 수년 전의 일이란다. 현행 의료분쟁조정제도에 의하면 의료 분쟁이 발생할 경우 의료 사고의 피해자가 한국의료분쟁조정위원회에 직접 분쟁 조정을 신청해야 한다. 2012년 4월에 출범한 해당 제도는 피해자와 의료인 간의 자율적이고 원활한 합의 또는 조정 및 중재를 이끌기 위해 시행되고 있으나 의료기관이 조정에 응할지 아닌지를 임의로 결정할 수 있는 임의적 조정절차 참여주의로 인해 제도가 실질적인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을 낳고 있다.
현행 제도 아래에서는 환자가 조정 신청을 하더라도 의료기관이 조정에 응하고자 하는 의사를 통지한 후에야 조정 절차가 개시된다. 의료기관이 어떤 사유로든 조정에 응하고 싶지 않다면 아예 조정 절차 자체를 거부할 수 있다. 즉, 의료기관이 동의를 거부하면 환자가 제아무리 조정 신청을 하더라도 아예 진행조차 되지 않는, 환자 입장에서는 매우 일방적인 데다 불리한 여건이 아닐 수 없다. 칼을 휘두를 수 있는 권한이 전적으로 의료기관에만 주어져 있는 까닭이다. 이로 인한 폐해는 자못 심각하다.
언론을 통해 알려진 우리나라 전체 조정 신청 건수 중 의료기관의 조정 참여율은 2012년 38.6%, 2013년 39.7%, 2014년 46.6%에 그친다. 이와 같이 유명무실한 조정제도 때문에 분쟁이 원만하게 해결이 되지 않는 경우가 많아 자연스레 의료 소송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해당 제도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사이 굳이 부담해도 되지 않을 소송으로 인한 사회적 비용은 더욱 커져만 가고 환자의 권리 또한 제대로 보호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의료 소송으로 가게 될 경우 피해자가 이길 수 있느냐 하면 현실적으로 그럴 가능성은 높지 않다. 이긴다는 건 극히 드문 사례라 할 만하다. 그럴 법도 하다. 의료분야의 전문지식이 부족한 환자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상대적 약자의 지위에 놓일 수밖에 없는 탓이다. 전문가인 의료인을 상대로 소송에서 의료행위를 통해 빚어진 과실을 환자와 그 가족들이 직접 입증하기란 결코 만만한 작업이 아니다.
고 신해철 씨 아내와 함께 청원서 제출에 동참했던 음악인 남궁연 씨는 23일 국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의료인들과 싸우고자 함이 아니다. 의사를 환자의 적으로 여기지 않는다. 다만, 공정한 판단을 위해 의료 분쟁 중재 맹점이 개선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오해는 없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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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우리가 신해철법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는 보다 명백해졌다. 누구나 병원을 이용할 수밖에 없으며, 또한 누구나 병원의 과실이 됐든 아니면 다른 이유가 됐든 부지불식 간에 의료 분쟁이란 곤란한 상황에 처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과 같이 환자에게 일방적으로 불리한 제도 하에서는 고 신해철 씨 가족이 무수한 고통과 아픔을 겪었듯 의료기관 앞에서의 우리 모두는 상대적 약자일 수밖에 없기에 비슷한 고통을 감내해야 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누구든 또 다른 신해철이 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이 법안은 특정한 누군가의 이익을 바라는 게 아니라 의료 분쟁은 너와 나 그리고 우리 모두가 언제든 겪을 수 있는 문제이자 사안인 탓에 궁극적으로 이를 해결하고자 하는 사회적 열망을 담고 있다. 신해철법이 반드시 통과되어 "환자에게 너무 불리한 의료소송 제도와 우리나라 의료 체계의 잘못된 제도, 관행들이 개선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던 고 신해철 씨 아내의 바람이 마침내 실현되고, 의료 분쟁으로 인해 억울함을 겪는 사람들이 더 이상 나오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이는 고 신해철 씨의 죽음이 결코 헛되이 되지 않게 하는 첩경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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