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접 경험의 즐거움

<인턴> 배우들의 은은한 미소가 흐뭇했던 영화

새 날 2015. 9. 25. 0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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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 동안 몸담아온 회사를 정년퇴직한 벤(로버트 드 니로)은 아내와 사별한 뒤 자신만의 삶의 방식을 터득한 채 이를 즐기고 있는 터다. 직장을 다닐 때보다 되레 바쁘게 느껴질 정도로 그의 일상은 활기에 넘쳐 보인다. 그러던 어느날이다. 우연히 시니어 인턴을 채용한다는 모 인터넷 쇼핑몰 회사의 광고를 발견한 그는 이에 지원하기로 하고 회사에서 요구해온 동영상 지원서 제작에 나선다.

 

면접에 응하기 위해 모처럼 수트를 빼입고 회사를 찾은 벤은 40년 직장 생활을 통해 쌓은 경험 탓에 일종의 배테랑에 속하지만 자유분방하면서도 무언가 분주해 보이는 젊디 젊은 이 회사의 분위기에 다소 긴장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그렇다고 하여 노련한 그가 주눅이 든 건 절대로 아니다. 수차례의 면접 절차 끝에 최종 합격을 통보받은 그는 30대의 자수성가 여성 사장인 줄스(앤 해서웨이) 밑으로 배속된다. 하지만 일종의 정부 시책에 따라 의무 고용 형태로 채용된 시니어 인턴은 30대의 젊은 사장에겐 그리 달갑지 않은 존재다.

 

 

시큰둥해하던 줄스는 그에게 특별히 맡길 만한 일거리를 찾지 못한다. 아니 실은 애초부터 일을 줄 생각이 없었던 게 맞다. 일이 생길 경우 이메일로 통보해주겠다는 그녀의 사무적인 지시가 이어지고, 그는 책상에 앉아 대기하면서 노트북을 열어 수시로 이메일을 확인하는 게 어느덧 가장 중요한 일과가 돼버렸다. 한편 그의 40년 동안의 직장 경험은 나이와 성별 등을 넘어선 뛰어난 소통 능력을 갖추도록 했으며, 덕분에 주변의 직원들 모두가 그를 따를 정도로 인간관계뿐 아니라 신망도 두터운 편이었다. 이렇듯 잠재됐던 그의 능력은 점차 두각을 나타내는데...

 

영화속 벤과 줄스는 20세기와 21세기, 구세대와 신세대, 굴뚝산업과 첨단산업, 혹은 아날로그와 디지털을 각기 상징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벤이 몸담았던 전화번호부 제작 회사는 디지털이 대세로 자리잡은 오늘날엔 전혀 쓸모없게 된 대표적인 직종 중 하나다. 이곳에서 40년 동안 근무했던 그에겐 21세기 들어 봇물 터지듯 밀려들어온 디지털 문명이 영 낯설게 다가올지 모르지만, 아날로그 시대의 덕목이던 성실함과 깍듯한 예절 그리고 겸손함 등은 여전히 장점으로 받아들여진다. 어쨌거나 한 직장에서 40년을 근무한다는 건 오늘날엔 도저히 상상조차 하기 힘든 일이다. 부사장직에서 정년 퇴직한 벤은 직장 생활을 통해 체득한 풍부한 경험과 노하우, 70세 즈음에 갖추고 있을 법한 여유, 거기에 패션 감각까지 뛰어난 누가 보더라도 완벽한 인턴이다.



줄스는 개인의 취향과 패션 성향 그리고 체형에 맞도록 옷을 제작하여 인터넷을 통해 판매하는 온라인 쇼핑몰을 창업, 대성공을 거두며 승승장구하고 있는 인물이다. 인터넷으로 요약되는 디지털 세상에선 형식이나 격식 따위는 필요 없고, 오로지 효율성을 최고의 덕목으로 치며, 능력만 된다면야 여성 남성 등의 성별 따위도 그다지 큰 의미로 다가오지 않는다. 물론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은 게 함정이긴 하지만 말이다. 줄스 그녀야 말로 디지털 시대에 가장 최적화된 인물이 아닐까 싶다. 대중들로부터의 각광 역시 아마도 그 때문이리라.

 

창업한 지 불과 1년 반 만에 직원 220명을 거느릴 정도로 주어진 24시간이 턱없이 부족하기 만한 그녀다. 사무실 내에서의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자전거를 타고 왕래할 만큼 말이다. 그녀가 성공 신화를 쓸 수 있었던 이유는 영화속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통해 고스란히 드러난다. 권위라고는 일절 찾아볼 수 없고 수평적 리더십을 갖추고 있는 데다, 오로지 직원과 고객만을 생각하며 회사에 모든 열정을 쏟아붓는, 일과 가정 모두를 소홀히 하지 않는, 그야말로 완벽을 추구하는 멋진 신세대 여성이 바로 줄스 그녀였다. 

 

 

30대의 여성 사장과 70대의 남성 인턴, 외양으로만 볼 때엔 어쩌면 전혀 어울릴 법하지 않은 이들 콤비이지만, 시니어 인턴만이 지닌 강점이 어느덧 빠름과 효율성 그리고 합리성을 추구하는 디지털 시대의 이면이자 감춰진 약점을 파고들며 서로에 대한 보완재의 역할을 톡톡히 한다. 이쯤되면 나이, 세대, 성별 그리고 시대마저 넘나드는 환상적인 조합이라 할 만하다. 아울러 이들에겐 남들은 절대로 갖추지 못한 탁월한 공통점 하나가 있었으니, 다름아닌 그들 얼굴에 수시로 그려지며 은은히 피어나는 예쁜 미소였다.

 

아카데미상만 2번씩이나 수상한 로버트 드 니로는 얼마전 뉴욕대학 티시 예술대 졸업식에서 다음과 같은 욕설 축사로 한 차례 화제를 불러모은 적이 있다. 그의 후배들을 아끼는 진심어린 조언에 학생들은 열광하지 않을 수 없었을 테다.

 

"졸업생 여러분, 해냈습니다. 그리고, 엿 됐습니다. 예술인의 삶은 변호사나 의사, 회계사 같은 안정된 삶과는 거리가 멉니다. 항상 열정과 함께 하되 거절당하는 인생이 예술가의 삶입니다. 화려한 졸업식이 끝나면 여러분 앞엔 '거절당하는 인생'의 문이 열릴 겁니다. 흔히 현실 세계라고 부르는 영역인데 작은 배역 오디션, 일자리 면접 등 수많은 거절을 경험할 겁니다. ... 하지만 저는 여러분이 결국 해낼 걸 압니다. 행운을 빌어요. 지금이 아니면 다음에!"

 

 

이 영화에서 로버트 드 니로는 마치 자신의 졸업식 축사를 직접 증명하기라도 하듯, 정부 정책 프로그램인 시니어 인턴이란 편견에 사로잡힌 채 처음엔 떨떠름하여 무언가 내키지 않아 하던 줄스 앞에서 '지금이 아니면 다음에라도, 그리고 결국엔 해낼 것이라'던 대로 보란듯이 자신의 경험과 능력 그리고 삶의 지혜를 선보이며 마침내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 성공한다.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와 천만 관객을 동원했던 '인터스텔라'에 출연한 앤 해서웨이가 패션 감각 뛰어난 유능한 자수성가 젊은 여성 사장으로 변신한 채 일하는 여성으로서의 일과 가정 사이에서 고민해야 하는 현실을, 아울러 일하는 여성을 바라보는 사회의 삐딱한 시선에 대해 이를 온몸으로 감내하는 연기를 실감나게 펼친다.

 

잔잔하면서도 섬세한 감정 묘사와 가벼운 웃음 코드는 감독이 여성일 것이라는 사실을 짐작케한다. 실제로 이 영화는 '로맨틱 홀리데이', '사랑할 때 버려야 할 아까운 것들' 등의 영화를 통해 알려진 여성 감독 낸시 마이어스의 작품이다. 일과 가정사 때문에 혼란과 고통을 겪던 줄스는 인생의 대 선배이자 멘토, 아울러 자신의 인턴이기도 한 벤의 짧고 굵은 조언, 때로는 친구와 같이 다정다감한 그의 역할을 통해 삶의 새로운 활력을 얻듯, 관객들은 그들을 통해 공감하며 대리만족감을 얻을 수 있을 테다. 로버트 드 니로의 그윽한 웃음 속에선 삶의 연륜과 여유를 느낄 수 있으며, 앤 해서웨이의 밝은 미소로부터는 우리의 마음까지 혼훈하게 만드는 유쾌한 감정이 전해져온다. 세대와 나이 그리고 성별을 초월하여 누구나 공감하게 되는 흐뭇한 영화다.

 

 

감독  낸시 마이어스

 

* 이미지 출처 : 다음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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