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접 경험의 즐거움

<함정> 당신이 빠져든 건 어쩌면 또 다른 함정

새 날 2015. 9. 10. 1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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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식(조한선)과 소연(김민경)은 결혼 5년차에 접어든 부부다. 하지만 아직 애가 없다. 여기에는 나름의 사연이 존재한다. 2년 전 임신한 아기를 유산으로 잃은 뒤 준식은 그로부터 기인한 듯한 트라우마를 겪기 시작했으며, 자신의 의지대로 되지 않는 현실 앞에서 그는 갈수록 의기소침해져갔다. 이러한 남편의 고통을 누구보다 안타까워 하는 이는 다름아닌 아내 소연이었으며, 그녀는 아기를 가진 평범한 부부를 볼 때마다 부러움 때문에 몸둘 바를 몰라 하곤 했다.

 

그러던 어느날이다. 소연은 준식에게 함께 여행을 가자고 제안한다. 배를 타고 한참동안 들어가야 하는 외딴섬이다. 식사를 하기 위해 소연이 유명하다는 맛집으로 안내하는데, 워낙 외진 섬 지역인 탓에 자동차 내비에도 표시되지 않아 길을 찾느라 애를 먹어야만 했다. 마침내 도착한 산마루 식당, 도심에서의 분위기와는 사뭇 다르다. 이들을 처음으로 맞이한 건 말 못하는 처자 민희(지안)였다. 첫인상부터 묘한 분위기를 뿜어내는, 무언가 사연이 있을 법한, 그러한 처자다.

 

 

이윽고 식당 주인인 성철(마동석)이 등장한다. 행동이 다소, 아니 많이 거칠다. 그는 닭 백숙을 추천해주며, 직접 잡는 모습까지 연출한다. 이러한 그의 행동에 경악한 부부이지만, 이내 상 위에 올라온 백숙 맛을 보더니 그 맛에 짐짓 놀라워하며 안심하는 눈치다. 이렇듯 그들 주변을 감싸고 있던 팽팽한 긴장감이 이완되자 술 한 잔이 생각났는지 부부는 술도 주문한다. 식사를 마친 부부가 식당을 떠나려던 찰나 차에 이상이 생겨 시동이 걸리지 않게 되고, 성철은 부부에게 이왕 이렇게 된 김에 자신의 집에서 술도 한 잔 마시면서 푹 쉬고 가라며 권해오는데...

 

영화 포스터에 이런 대목이 있다. 'SNS를 통해 사람이 사라진다. 최근 5년, 실종사건 25만건, 2만3천명의 생사불명자' 난 이 문구와 마동석이 출연한다는 사실만을 알고 이 영화를 관람했다. 심지어 장르조차 모른 채였다. 결과는 어땠을까? 시쳇말로 깜놀해야 했다. 심장이 쫄깃해질 정도로 말이다. SNS의 부작용으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사회 문제를 환기시키고자 마동석이 몸소 활약하는 그러한 내용을 떠올렸건만, 나의 상상은 보기좋게 무너지고 만다. 최근 출연한 작품에서 주로 코믹한 감초 역할을 맡아 ‘마요미’라는 별명까지 얻는 등 친근한 이미지로 각인됐던 마동석의 연기 변신은 그야말로 놀랍다. 씩 웃으며 '동생, 술 한 잔 더해' 라는 말 속에 얼마나 치명적인 함정이 도사리고 있는지, 영화 중반쯤 접어듦과 동시에 이를 깨닫게 된다.

 

 

그러나 영화의 시작은 싱겁기 짝이 없다. 그냥 잔잔한 드라마 한 편을 보는 느낌마냥 다소 심심하다. 아마도 부부에게 놓인 문제점과 의기소침함에 빠진 준식의 처지를 표현하기 위한 의도적인 장치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스릴러 장르로서의 강렬함과 섬뜩함을 더욱 부각시키기 위한 나름의 연출 기법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밋밋한 전반부가 오히려 중반 이후의 충격적인 장면과 내용을 더욱 돋보이게 해주는 역할을 톡톡히 하는 탓이다.



과거의 청춘 미남 스타, 조한선의 등장은 여간 반가운 일이 아니다. 물론 그의 잘 빠진 외모에 비해 다소 맥 빠지는 배역과 끔찍한 환경에 처하게 되는 영화 속 현실이 무척 안타깝긴 하지만 말이다. 말을 못 하게 된 연유를 알게 되면 더 없이 섬찟하기 그지없는 데다, 성철에 의해 산마루 식당에 눌러앉은 채 그의 완력에 휘둘리면서도 왠지 성철과의 진짜 관계가 의심스럽기 만한 민희 역을 맡아 열연했던 지아는 앞서도 언급했듯 묘한 분위기를 뿜어내는 배우다. 성철과 이 처자의 어울릴 법하지 않은 부조화가 오히려 이 영화의 참맛을 제대로 살리는 느낌이다.

 

 

권형진 감독이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현대 사회의 잔인한 현실을 영화적으로 빗대어 표현해 본 작품이다. 현대인들의 일상에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SNS를 통해 현실의 끔찍한 단면을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에서 출발했다. 많은 이들이 소통 수단으로 사용하는 SNS를 소재화함으로써, 관객들이 공감할 수 있는 긴장감을 만들어보고 싶었다. 현실의 잔인함을 직면하게 되는 상황에서 사람들은 어떻게 느끼고 행동하는지에 초점을 맞췄다."

 

아울러 이러한 소재를 내세운 덕분인지, 금융감독원은 보이스피싱 피해 예방을 위해 영화 '함정'과 함께 공동 캠페인을 펼치기로 했단다. 실제로 금감원의 캠페인 문구가 들어간 영화 '함정' 예고편을 쉽게 만날 수 있다. 하지만 SNS를 소재로 했다고 하여 감독이나 금감원이 의도하는 만큼 일반인들에게 강한 경각심을 일깨울 수 있을까 하는 점은 솔직히 미지수다. 영화 전반부에서 아내인 소연이 스마트폰을 이용해 성철과 접촉하는 장면이 살짝 등장하긴 하지만, 이는 그저 요식 행위일 뿐 영화의 본질은 본능에 이끌린 채 성철의 잔혹함과 함정 속에서 허우적대는 사람들의 안타까운 현실만을 비출 뿐이기 때문이다. 즉 철저하게 본능에 충실하려는 이들을 제3자의 시각에서 바라보며, 그로부터 대리만족감 따위를 얻게 하려는 취지만이 더욱 돋보인다는 의미이다.  

 

 

관객으로 하여금 관음증을 유발하면서도 보일 듯 말 듯한 아쉬움만을 남기거나 잔혹함을 표방하면서도 그다지 섬뜩하지 못했던 비슷한 류의 영화들과는 달리 이 영화는 화끈하면서도 시원스런 묘사와 표현을 통해 왠지 응어리져 있을지도 모를 마음속 한켠의 찌꺼기들을 한꺼번에 날려주는 통쾌함 정도는 맛보게 해준다. 몰입감 역시 최고다. 때문에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찜찜함보다 배설했을 때의 속 시원한 감정과 쾌감을 얻을 수 있다는 점이 이 영화가 갖춘 미덕이 아닐까 싶다. 물론 장르도 장르이지만, 앞서 든 이유들 때문에 호불호가 분명하게 갈릴 영화임엔 틀림없지만 말이다.

 

SNS가 주는 편리함 그리고 즐거움, 이러한 마력에 빠져든 채 아무런 의심없이 쉽게 이끌려온 외딴섬, 철저하게 고립된 공간에서 벌어지는 예측 불허의 사건들, 영화 '함정'을 통해 전해지는 극도의 공포감과 불편함이 과연 관객들로 하여금 SNS 등의 도구가 빚어내는 각종 첨단 함정 놀음에 대한 경각심을 강하게 일깨울 수 있을까? 왠지 이에 대한 설득력이 약하게 다가오는 건 비단 나뿐일까? 이조차 혹시 함정이 아닐까? 

 

 

감독  권형진

 

* 이미지 출처 : 다음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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