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저냥

'여행도 대출 받아 가세요' 빚 권하는 사회

새 날 2015. 8. 26. 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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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최경환 부총리가 빚 내서 집 사라고 한 적이 없다고 말하여 세인들의 비난을 자초한 바 있다.   당시 최 부총리는 자신은 빚 내서 집 사라 한 적이 없고 저금리 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의도치 않게 가계부채가 늘어난 것뿐이라고 했다.  물론 부총리씩이나 되는 사람이 국민들더러 직접 빚을 내서 집을 사라고 권유했을 리는 절대로 만무하다.  하지만 정부가 부동산 정책과 관련하여 오락가락 신호를 보낸 것만큼은 분명하고, 그에 따라 실제로 가계부채가 빠른 속도로 늘어나게 된 현실 또한 엄연히 부인할 수 없는 노릇일 테니, 이는 결국 빚 내서 집 사라는 권유와 뭐가 다르겠는가 싶다.

 

사방팔방에 놓인 TV를 켜면 시시각각으로 흘러나오는 대부업 광고들이 온통 서민들의 귀와 눈을 홀린다.  하도 자주 접하다 보니 어느덧 이에 세뇌된 채 입에선 광고 멘트가 절로 흘러나오는 지경이다.  아이들마저 광고에서 나오는 노래를 자연스레 따라부르곤 한다.  무서운 세상이다.  여성만을 위한 특화된 서비스가 선보일 만큼 이들은 이 불경기에도 오히려 호황을 누리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전화 한 통이면 신용 점수고 뭐고 간에 필요 없이 바로 자신의 통장으로 입금을 해 주겠다며 온갖 사탕발림으로 유혹하니 당장 급전이 필요한 서민들은 홀딱 넘어가기 일쑤다.  

 

ⓒ경향신문

 

돈이 없어 학업을 포기해야 하는 학생들에겐 학자금 융자를 해 주겠다며 걱정하지 말란다.  물론 이들은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수천만원에 해당하는 빚부터 떠안고 가야 할, 고단한 삶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이지만 말이다.  심지어 성형수술 병원마저 대부업체와 손을 잡고 당장 자금이 부족하지만 빨리 예뻐지고 싶어 하는 이들을 위해 친절하게도 이와 관련한 자금을 빌려주기까지 한다.  성형대국의 완성은 이렇듯 빚 권하는 사회 풍조와 한 몸인 셈이다.  그야말로 아무 조건 없이 저금리로 필요할 때마다 전화 한 통화만으로 목돈을 빌려 주겠다는 사람들이 이토록 넘쳐나고 있으니, 우리가 사는 이 곳은 얼마나 좋은 세상인가. 

 

물론 그에 따른 대가는 혹독하다.  지난 25일 한국은행이 발표한 ‘2015년 2분기 중 가계신용’ 자료에 따르면 지난 6월 말 기준 가계신용 잔액은 1130조5000억원에 이른다.  지난 분기보다 32조원이 늘었다.  가파른 변화다.  전문가들은 가계빚 규모 자체가 당장 금융시장 안정을 위협할 정도는 아니라고 한다.  하지만 왠지 두렵다.  당장 중국발 쇼크와 미국의 금리 인상 효과가 시장에 반영되고 있는 상황이라, 내가 아무리 경제에 관한 문외한이라 해도, 외부 변수와 만나면 위험해질 수 있다는 전문가들의 잇단 경고는 두렵기만 하다.  한국은행이 제시한 가계신용 잔액 추이 그래프의 상승세를 보고 있자니 전문가들의 우려가 괜한 게 아님을 실감케 한다.

 

 

이런 상황에서 여행사마저 빚을 권하고 나섰다.  이쯤되면 점입가경이 아닐까 싶다.  국내 굴지의 모 여행사가 아예 대부업체를 차린 뒤 여행 상품을 이용하는 고객에 한해 자금을 빌려 주기 위해 나선 것이다.  이를 운용하고 있는 회사에 따르면 해당 상품은 연 2.49-4.49%의 이율로, 신용카드 할부 이율이나 은행 신용 대출 금리보다 오히려 저렴하단다.  어차피 해당 상품에 대한 선택은 개인의 몫이 될 테고, 정 필요치 않은 사람은 이용하지 않으면 그만인 데다, 고객의 니즈를 충족시켜 다양한 선택의 폭을 넓힌 셈이니 환영해야 하는 게 아니냐는 반응과 과소비를 조장하거나 채무자를 양산하는 결과밖에 더 낳겠는가 하는 우려 섞인 목소리가 한데 얽힌 모양새다.

 

그렇다면 이를 어떻게 봐야 할까?  물론 여행 대출 상품이 반드시 필요한 사람이 없을 수는 없다.  딱히 떠오르는 사례는 없지만, 어쨌거나 이들에겐 해당 서비스를 통해 그야말로 사막의 오아시스마냥 긍정적인 효과를 기대할 만할 테니 말이다.  하지만 여행이란 개념과 본질을 생각해 본다면, 대다수의 사람들에겐 그다지 도움이 될 만한 성질의 것이 아닐 듯싶다.  비단 해외가 됐든 국내가 됐든 여행 코스 하나를 결정하기까지 우린 일정과 경비 등 수많은 판단과 결단을 내려야만 한다.  여행 대출 상품은 이렇듯 중요한 과정 중 하나인 경비와 관련한 머리 지끈한 문제를 뒤로 돌려놓을 공산이 크다.  일단 저지르고 보자라는 심리를 유발하게 된다는 의미다.

 

ⓒ뉴시스

 

우린 여행 하면 언뜻 '여유'라는 단어 하나를 떠올리기 십상이다.  일반적으로 '여유' - 여기서의 '여유'란 경제적인 것과 심리적 그리고 신체적인, 일체의 것을 의미한다 - 가 허락되지 않는 한 여행이란 그저 언감생심에 불과할 뿐이다.  그러나 여행 대출 상품은 이렇듯 여유가 허락되지 않은 사람에게조차, 당장의 경제적 어려움 따위를 잊은 채 우선 여행부터 즐길 수 있도록 해 준다.  물론 뒷감당은 개개인이 알아서 책임질 노릇이긴 하다.  바로 이 대목에 해당 상품의 함정이 도사린다.  

 

자신의 분수와 처지는 아랑곳없이 일단 남들 다 간다는 해외여행부터 저지르고 보는, 이른바 과소비를 유발할 개연성이 높으며, 이는 앞서 언급한 가계부채 문제와 직간접적으로 연결된 채 자칫 한 가정은 물론이거니와 국가 경제마저 파탄나게 하는 뇌관으로 작용할 가능성마저 점처진다.  이렇듯 부작용이 긍정적인 기대효과를 덮어버릴 만큼 크게 와닿는 경우라면, 차라리 없느니만 못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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