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저냥

아내에게 해서 좋은 말, 해선 안 될 말

새 날 2015. 8. 22.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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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우연히 벌어진 일이다.  그날 난 아내와 함께 식사하던 중이었다.  우리 부부는 평소 허물 없이 지내는 편이라 대화 내용이나 형식 따위에 대해 특별히 신경을 기울이지 않는다.  함께 살아온 시간이 제법 된다는 의미다.  때문에 그날 아내와 나 사이에 무슨 얘기가 오갔는지를 기억해내기란 솔직히 어려운 노릇이다.  다만, 무슨 연유였는지는 모르겠으나 난 아내에게 이런 말을 한 기억만큼은 또렷하다. 

 

"누구나 분노할 때가 있잖아.  문득 분노를 참지 못 하는 순간과 맞닥뜨리다가도 당신이 곁에 있을 경우 신기하게 분노가 눈 녹듯 사라진다"

 

난 거짓말을 잘 못 한다.  이는 충분히 단점이거나 혹은 장점으로 작용할 수도 있는 사안이다.  이러한 성격을 잘 아는 아내이기에 그녀는 당시 나의 말이 결코 헛된 게 아님을 잘 알고 있던 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믿기질 않았는지 재차 확인에 나선 아내다.  그런데 난 당시 아내의 얼굴 표정을 슬쩍 곁눈질로 보면서 내심 뿌듯함 내지 감동 따위가 그녀의 얼굴 위로 언뜻 스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내 성격상 평소 입 바른 소리나 미사여구 그리고 쓸 데 없는 소리를 하지 않는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아내이기에 사실 그대로를 받아들인 듯한 느낌이라고나 할까.

 

그래, 여자들은 말 한 마디만으로도 기분이 심하게 상하거나 반대로 붕 뜨기도 한다는데, 아마도 이런 경우가 그에 해당하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이런 류의 행동은 사실 돈 드는 일이 아니기에 백번 천번을 해도 손해볼 장사가 아님은 분명하다.  물론 평소 겉치레가 요란한 말을 자주 해 온 사람의 경우라면, 충분히 다른 결과를 낳을 법한 사안이긴 하지만 말이다.  그런데 내게 있어 아내의 존재란 실제로 앞서 언급한 사실 그대로다.  분노가 솟구치는 상황에서도 그녀의 존재만으로 나의 분노가 쉽게 가라앉곤 하는 탓이다.  난 있는 그대로를 얘기한 것 뿐인데, 당시 아내에겐 그 어느 상황보다 달달함으로 다가왔던 모양이다.



그런데 나만의 특이한 성격 내지 성향이 늘 좋은 일만 만드는 건 아니었다.  정반대의 사례도 늘 겪기 마련이다.  그날도 난 아내와 함께 외출 중이었다.  길을 걷고 있는데 맞은 편에서 한 젊은 처자가 걸어오고 있었다.  얼굴이 잡티 하나 없이 깨끗한 데다 흰 티셔츠를 입은 바람에 눈에 띄던 상황이다.  특별히 예쁘다는 느낌보다는 맑고 투명하다는 이미지가 강했다.  이 대목에서 오해하는 분이 계실까봐 노파심에서 말하지만, 분명 일부러 뚫어져라 쳐다본 건 아니다.  난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다. 

 

"얼굴이 하얗고 깨끗한 사람이 흰색 옷을 입으면 더욱 화사해 보이더라"

 

아내를 누군가와 빗댈 의향으로 말하려던 건 분명 아니다.  그저 길을 지나다 우연히 보게 된 처자 때문에 영감을 얻긴 했지만 말이다.  물론 아내도 얼굴이 하얗고 여전히 피부가 깨끗한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아울러 난 그 처자를 의식적으로 본 게 아니었고, 슬쩍 스치며 봤기 때문에 아내는 그녀의 존재를 절대로 알 리 없었을 것이라 자신했던 터다.  아니 솔직히 그러한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고 봐야 함이 옳겠다.  왜냐면 모르고 있는 게 너무도 당연하다고 여기고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아내로부터 돌아온 말은 애초 나의 예측을 크게 벗어났다.  매서웠다.

 

"그럼 나는 그렇지 않다는 얘기인 거야?"

 

"당신도 물론 예전엔 고왔지.  하지만 이젠 얼굴에 주름이 제법 있잖아"

 

"아까 하얀옷 입은 그 여자 보고 하는 말이지?"

 

헐..  난 순간 뜨끔했다.  절대로 그 처자와 아내를 비교하려 함이 아닌 데다, 아내는 전혀 눈치 못 챘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게 그렇지가 않았던 모양이다.  아내의 레이더망은 내가 생각하는 수준을 훌쩍 넘어서고 있다는 의미 아닌가. 

 

"봤어?  언제 봤냐"

 

"예전엔 안 그러더니 이젠 대놓고 비교한다 이거지?"

 

헐..  난 졸지에 파렴치범이 돼버렸다.  정작 문제는 이런 식의 아내 투정이 이번 단 한 차례로 끝나는 게 아니라는 데에 있다.  함께 운동을 하다가도, 길을 걷다가도, 아내는 불쑥 불쑥 내게 이런 말을 꺼내곤 한다. 

 

"왜, 얼굴 하얀 여자가 흰옷 입고 있으면 그렇게 예쁘다며?"

 

아니 무언가 꼬투리를 잡아야 할 상황이 생길 때마다 이런 말을 꺼내며 나를 인정사정 없이 꼬집거나 내 등짝을 한 대씩 후려 패는 게 아닌가.  이쯤되면 수도 없이 우려먹고 달여먹는 사골국과 동급인 셈이다.  물론 농담이란 건 잘 안다.  하지만 특별한 의도가 숨어 있지 않은 말이라 해도 애초 아내의 신경을 거슬리게 만든 건 결정적으로 나의 실수다.  함께 살아온 세월이 꽤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난 여전히 여자, 아니 아내의 비위 하나 제대로 맞추지 못 하고 있는 셈이니 말이다.  

 

제아무리 허물 없는 부부 사이라 해도 아내에게 해서 좋은 말, 해선 안 될 말이 엄연히 따로 있는가 보다.  물론 그렇다고 하여 가식적이거나 형식적으로 듣기 좋은 말만 가려 가며 하라는 의미는 절대로 아니다.  어차피 아내와 나눌 대화라면 기왕지사 아내를 기쁘게 하는 말이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지구 평화에 이바지할 공산이 훨씬 클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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