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편린들

'동창' 사칭 사기, '순수'마저 의심해야 하는 세상

새 날 2015. 5. 20. 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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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학교에서 공부를 한 사이를 뜻하는 '동창'이란 단어는 참으로 살갑다 못해 애틋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이러한 감정이 드는 건 비단 나뿐만이 아닐 테다.  근래 각종 미디어 매체들로부터 대세로 떠오른 복고 내지 추억팔이의 한 축을 담당하는 요소도 다름 아닌 이러한 학창시절의 아련했던 추억들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동창'이란 단어에 이토록 설레해 하는 걸까?  현실의 팍팍함과 고단함을 어린 시절의 반가움과 친근한 느낌으로 조금이라도 희석시켜 보려는 속내 탓일 테다.  물론 과도한 추억팔이 현상은 지나치게 상업적으로 흐른다거나 현실 도피적이며 과거를 미화하려는 속성을 지녔다는 점이 엄연한 한계로 다가오긴 하지만, 과거에 대한 소비가 현실의 어려움을 극복하는 원동력으로 작용할 수 있다면 반드시 부정적으로 볼 일만도 아니다. 

 

나이 듦의 공통 현상 중 하나는 아마도 전체 삶에서 과거를 추억하며 이를 소비하는 일의 비중과 밀도가 점차 커져가고 있다는 점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이러한 점을 교묘히 상술로 역이용한, 아니 상행위의 수준을 훌쩍 넘어 사기 행각을 벌여온 일당이 경찰에 덜미를 잡혔다는 소식이다.  조직적으로 사무실에 콜센터를 차려놓고 사전에 입수한 각급 학교별 동창생 명부를 이용해 전화를 걸어 동창생인 양 가장한 채 잡지 판매를 일삼아왔던 일당들이란다.  이쯤되면 진정한(?) 의미의 추억팔이 아닐까 싶다.

 

ⓒJTBC 방송화면 캡쳐

 

더욱 놀라웠던 건 이러한 방식으로 편취한 금액이 무려 100억여 원에 이르고, 총 8만 5천여 명에 달하는 피해자가 발생했다는 사실이다.  일당들은 해당 수법을 10년전부터 활용해 왔으며, 피해를 당한 사람들은 비록 두 배 이상으로 비싸게 구입하긴 했어도 어쨌거나 큰 금액이 아닌 데다 실제 잡지라는 형태의 실물을 받아볼 수 있었기에 자신들이 사기를 당한 줄도 모른 채 신고 따위는 아예 꿈도 꾸지 않았던 모양이다.  사기 일당들에겐 그야말로 맨땅에서 헤엄치기 아니었을까 싶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실은 내게도 비슷한 경험이 있다.  사회 초년생 시절의 일이다.  회사로 걸려온 나를 찾는 전화 한 통, 수화기 저 너머로부터는 마치 예전부터 나를 잘 알고 있기라도 한 양 자신의 신분을 동문 선배라 밝힌 정체 모를 사람의 사근사근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아는 선배 및 동창의 이름과 근황을 언급하더니, 잡지사에서 근무하고 있는데 한 번만 도와달란다.  주간지 1년치를 정기구독했다.  동문이라는 말에 섣불리 거절하기가 힘든 상황이었다.  물론 상대방은 애초 그러한 약점을 노리고 접근했을 테지만 말이다.  당시엔 미처 사기라는 생각을 못했다.  사회물을 조금 더 먹고 나서야 돌이켜 보니 일종의 사기 수법에 당했음을 알게 된 것이다.  

 

 

한 가지 사례가 더 있다.  온라인상에서 동창 카페가 운영되고 있는데, 회원 명부와 근황을 적은 파일을 운영자가 아무런 의심없이 이곳에 올렸다가 누군가 이를 빼돌린 뒤 친구들에게 전화하여 사기 행각을 벌여온 사실이 한참 뒤에 밝혀졌다.  다행히 내겐 사기 전화가 걸려오지 않았으나 친구 여럿이 비슷한 전화를 받았던 모양이다.  우선 운영자의 실수를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다.  파일을 저장할 때 조금만 주의를 기울였다면 회원만 접근 가능하게끔 할 수도 있었을 법한데, 이를 소홀히 한 탓이다.  물론 제아무리 주의를 기울인다 한들 맘먹고 사기를 치려는 이들을 이길 재간이 없긴 하지만 말이다. 

 

그런데 이번 콜센터 사건은 단순히 동문을 사칭한, 그러한 형태의 것이 아니다.  아련한 초등학교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 당시 여자 동창생을 사칭한 채 중년 남성들에게 접근하였으며, 이들의 공허한 마음은 여자 동창생이라는 말 한 마디에 사실 여부를 확인할 겨를조차 없이 일순간 와르르 무너져 이성을 잃었을 테고, 덕분에 오히려 호의를 베풀어가며 그들의 사기 행각을 도운 꼴이 됐을 테다.  일종의 심리를 이용한 고도의 사기 기법이었던 셈이다.

 

비단 '동창'만이 아니라 최근 복고나 추억팔이를 이용한 사기에 무장해제 당하지 않기 위해선 결국 개개인이 주의를 기울이는 방법밖에 없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어느덧 학창시절 추억조차 더 이상 순수함으로 바라볼 수 없게 된, 삭막하고 무미건조한 곳이 돼버렸다.  아련한 추억이 담긴 '동창'이라는 단어에 어쩌다 이토록 오염된 이미지가 덧붙여지게 된 건지 보면 볼수록 참으로 씁쓸하기 짝이 없다.  몸소 겪었던 앞선 사례들 때문에라도 앞으로 각종 동창 카페라든가 밴드 그리고 커뮤니티 등에서의 활동 역시 위축되거나, 하더라도 못내 찜찜할 수밖에 없잖겠는가.  '동창'이란 순수하고 애틋한 단어에 '의심'이란 몹쓸 이미지를 덧씌우는 데 일조한, 이러한 파렴치한 이들에게 엄중한 법적 처벌이 내려져야 함은 지극히 당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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