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편린들

'자살금지 서약서'로 청소년 자살 막을 수 있나

새 날 2015. 5. 21. 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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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초등학교가 1학년 학생들에게 ‘자살을 하지 않겠다’고 서약하라는 내용의 통신문을 각 가정으로 보낸 사실이 알려져 논란이 일고 있습니다.  지난 16일 초등학교 1학년 자녀를 둔 한 학부모가 학교에서 보낸 자살방지 안내문이라는 게시물을 온라인 커뮤니티 게시판에 올리면서 이 같은 사실이 세상에 알려졌는데요.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공개된 통신문의 제목엔 ‘생명 사랑 서약서’라 쓰여 있었고, 총 4가지의 실천 조항이 기재돼 있었습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나는 절대로 자살하지 않을 것이며, 자해나 자살을 시도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2. 나는 자신의 건강을 위해 적당한 휴식과 수면을 취하겠습니다.

3. 내 주변에 자살할 수 있는 모든 도구를 없애며 술, 담배 등 약물에 의지하지 않겠습니다.

4. 나는 자살하지 않기 위하여 조금이라도 기분이 상하면 반드시 다른 사람에게 알리고 고민과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상담하겠습니다.

 

그리고 맨 아래엔 서약 당사자와 증인이 서명을 하도록 돼 있습니다.  청소년 자살 예방 조치의 일환으로 보이는 결과물입니다.  이를 통해 학생이나 학부모에게 생명의 소중함과 점증하는 청소년 자살에 대한 각성 효과를 노렸음직합니다만, 솔직히 몇 가지 부분에서 차라리 하지 않음만 못한 결과를 빚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떨치기가 어렵습니다.

 

우선 서약서의 내용이 과연 초등학교 1학년생에게 적합한 수준이었는가를 되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술과 담배 등 약물 언급도 그렇거니와 자살 도구나 자살 시도, 그리고 자해 따위의 어휘도 상당히 부적절해 보입니다.  짐작컨대, 적어도 중고등학생 수준 이상의 청소년을 대상으로 했던 서약서 양식을 초등 1학년생에게 문구 하나 고치지 않은 채 그대로 사용한 것으로 읽히는 대목입니다.  좋은 취지에서 비롯된 시도에 비해 성의가 없는 바람에 애초의 의도마저도 빛이 바래는 모양새입니다.  아울러 이러한 형식적인 서약서 한 장으로 과연 얼마나 실질적인 자살 예방 효과로 이어지게 될지도 의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연합뉴스

 

이렇듯 일선 교육 현장에서의 다소 뜬금없는 제스처를 보고 있자니, 문득 얼마 전 교육 수장인 황우여 교육부장관의 청소년 자살 관련 발언을 떠오르게 합니다.  그는 지난 1월 28일 ‘2014년 행복교육모니터링 성과보고회’에 참석, 초중고등학생의 자살이 4년 전 153명에서 매년 꾸준히 줄어들고 있지만 지난해에도 여전히 118건이 발생했고 특히 초등학생의 자살이 증가했다며, 올해는 어떻게 해서라도 청소년 자살을 두자릿수 이하로 줄이겠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실제로 지난해 국감 자료에 따르면 최근 5년간 전국의 초중고에서 자살한 학생은 630명에 달합니다.  평균 3일에 한 명 꼴로 자살을 시도하고 있는 셈인데요.  특히 초등학생의 자살이 더욱 증가하는 등 자살 시도 연령층이 갈수록 낮아지고 있는 점은 우려스러운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장관의 발언 중 특별히 눈에 띄는 대목 하나가 있습니다.  다름 아닌 '어떻게 해서라도 자살을 줄여보겠다'라는 부분입니다.  일선 교육 현장에서의 자살예방교육이 부쩍 늘어나고 있는 현상은 이의 일환으로 보이며, 이번 자살 금지 서약서 역시 같은 맥락으로 읽히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청소년의 자살, 특히 초등학생의 자살을 줄일 수 있는 건 이러한 형식적인 정책으로는 어림 없는 일입니다.  아이들이 자살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극단적인 상황으로 내몰리는 근본 원인을 해결하지 않는 이상, 작금의 탁상공론만으로는 절대로 아이들을 죽음의 유혹으로부터 벗어나게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한국 아동의 행복감은 세계에서 가장 낮은 수준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는 국제구호개발 NGO 세이브더칠드런과 서울대학교 사회복지연구소가 15개 국가를 대상으로 한 '아동의 행복감 국제 비교연구'를 통해 밝혀진 결과입니다.  함께 조사된 네팔, 남아공보다 낮은 수준이라는 사실은 그야말로 충격이자 자존심 상하게 하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경제적으로는 월등히 앞섬에도 불구하고 왜 이러한 결과가 빚어지게 된 것일까요?  전문가들에 따르면 한국 아동의 행복도가 낮은 이유는 자기 자신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 정도가 낮고, 시간 선택의 자유가 부족한 탓으로 분석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아동 관련 정책이 학습과 물질적인 지원에만 지나치게 치중돼 있는 사실을 문제점으로 꼽고 있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볼 때 교육 체계와 정책, 그리고 지나치게 경쟁 속으로 내몰고 있는 사회 전반의 분위기가 아이들마저 우울감에 빠지게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련 정책을 입안하는 부처나 이를 시행하는 일선 현장에서는 근본 원인에 대한 해법을 제시하기보다는 실적 위주의 눈에 보이는 형식적인 정책에만 몰두하고 있으니 답답하지 않을 수 없는 노릇입니다.

 

단언컨대, 아이들이 자살 금지 서약서를 작성한다고 하여 자살이 줄어드는 마술 같은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아이들이 행복감을 찾을 때에야 비로소 그것이 줄어들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비단 아동뿐 아니라 국가 전체의 높은 자살률은 우리 사회만이 가진 구조적인 문제들로부터 기인합니다.  따라서 이는 근시안적이며 보여주기식으로 대처한다고 해서 해결될 사안이 결코 아닙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자살을 줄여보겠노라는 성과주의에 매몰된 채 실적쌓기 내지 숫자놀음에 치중하다 보니 또 다시 이러한 무리수가 빚어진게 아닐까 싶어 못내 씁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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