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편린들

도서정가제, 정부가 간과하고 있는 한 가지

새 날 2014. 11. 21.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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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일부터 도서정가제가 전면 시행된다.  이를 하루 앞둔 20일 온라인 서점들은 인상되기 전 도서 구입을 노린 도서 구입자들로 인해 서버가 다운되는 등 하루종일 극심한 혼란을 겪어야 했다.  진풍경이다.  소비자들의 불만도 그와 함께 극에 달했다.  단통법에 이은, 또 다른 시장 규제로 왠지 자신들의 숨통을 조여온다는 느낌 때문일 테다.

 

ⓒ경향신문

 

하지만 도서정가제의 태생은 애초 소비자에 대한 배려보다 도서 가격이 왜곡되어 빈사 상태에 빠진 국내 출판 생태계를 바로잡고 동네서점을 살리자는 데서부터 비롯됐다.  단통법과는 그 출발선이 다르다는 의미이다.  그렇지만 일반 소비자들 입장에선 누구를 위한 정책이 됐든 그보다는 정부의 지나친 시장 개입과 규제책이 그저 피곤하게만 와닿을 뿐이다.

 

그렇다면 이번 도서정가제는 어떤 내용을 담고 있을까?  최대 19%까지 가능했던 책 할인율을 15%로 제한하였으며, 그로부터 자유로웠던 18개월 이상의 오래된 서적까지 모두 대상에 포함시킨 게 주요 골자다.  기존 거래 판도를 크게 뒤흔들 것이라 예상되는 대목이다. 

 

ⓒ경향신문

 

정부는 출판계에서 할인을 염두에 둔 가격 책정 관행이 사라짐으로써 장기적으로는 책값이 내려가는 효과가 나타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러나 한국개발연구원(KDI)은 책값 상승으로 소비자의 손실이 커질 것이라면서 새로운 도서정가제가 소비자의 편익을 훼손하고 결과적으로 도서 시장을 위축시킬 것이라 보고 있다.  과연 누구의 전망이 맞을 것인지는 예단하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다.

 

하지만 정부가 이번 정책을 내놓으면서 간과한 게 한 가지 있다.  알다시피 생태계라는 건 개체들 상호 간뿐 아니라 주위 환경과도 서로 밀접하게 영향을 주고 받아야 건강하게 유지될 수 있는 성격의 것이다.  그러한 측면에서 볼 때 이번 도서정가제는 출판 생태계를 살리기 위해 내놓은 정책 치고는 너무 파편화된 탓에 과연 제대로 된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낼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책은 대표적인 문화상품이다.  이를 소비하기 위해선 도서 자체의 가격뿐 아니라 주변 여건이 무르익어야 한다.  일례로 일에 치여 허덕이는 사람에겐 집에서의 휴식조차 사치로 와닿는 일이거늘 독서는 그저 언감생심일 테다.  책값과는 별개로 도무지 독서할 짬을 내기가 쉽지 않다는 의미가 된다.

 

ⓒ연합뉴스

 

미안하지만 이 대목에서 또 다시 OECD 통계를 들먹거려야 할 것 같다.  지난해 근로시간을 조사한 결과, 한국이 2천163시간으로 OECD 34개 회원국 중 2위를 차지한 것으로 드러났다.  OECD 평균의 1.3배에 달한다. 

 

한국인들의 근로시간은 통계 결과가 있던 2000년부터 2007년까지 부동의 1위 자리에서 내려온 적이 없지만, 그나마 2008년 멕시코에 1위 자리를 넘겨준 바 있다.  이와 같은 결과를 놓고 볼 때 모 정치인이 화두로 꺼내든 '저녁있는 삶'은 실상 대다수의 직장인들에겐 꿈만 같은 얘기일 테다.  여가시간 자체가 없는 상황에서 문화상품이 눈에 들어올 리가 없다.

 

한편, 문화관광부가 내놓은 2013 국민도서실태조사에 따르면 성인 10명 중 7명은 1년동안 도서관을 한 차례도 이용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으며, 18세 이상 성인들이 한 해동안 읽은 책은 평균 10권 정도인 것으로 조사됐다.  그렇다면 시간적 여유가 조금은 넉넉한 이들에겐 또 어떻게 다가올까?  안타깝게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것 같다.



그 이유는 여러 곳에서 찾을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 주변에 공공도서관이 많지 않다는 사실이 한 몫 단단히 거든다.  공공도서관이 주거지 지척에 있을 경우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독서율이 높다는 한 통계 결과가 이를 대변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책 안 읽는다고요? 공공도서관을 늘려 주세요  참조)

 

우리에게 주어진 여가시간은 턱없이 부족하다.  저녁있는 삶을 꾸려나가기가 녹록지 않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팍팍한 삶의 근간이 되는 사회적 여건이 단기간 내에 변화될 만한 사안이 결코 아니기에 이러한 현실이 더욱 갑갑하게 다가온다.  간혹 시간적 여유가 있는 이들조차 책을 쉽게 접할 수 있는 환경이 될 수 없기에 우린 늘 책과 멀찍이 떨어져 살고 있다.  굳이 선진국의 예를 들 필요조차 없이 내 주변 상황만 놓고 봐도 부근에서 작은 도서관 하나 찾기가 쉽지 않은 일이다. 

 

출판계의 생태계가 도서정가제 등의 도서 가격 정책만으로 확 바뀔 수 없으리란 건 불을 보듯 뻔한 노릇이다.  결국 요는 국민들이 책을 읽을 수 있는 주변 여건과 환경을 만들어주고, 동시에 도서정가제와 같은 출판사 장려책이 곁들여지는 구조가 되어야 출판 생태계에 숨통이 트인다는 의미일 테다.  물론 앞서 언급한 내용들은 모두 예산이 많이 드는 일일 테니, 결국 시간을 갖고 차근차근 준비해 나가야 한다는 뜻이 된다.  그런 측면에서 볼 때 이번 정책이 가져올 효과는?  글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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