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편린들

격(格)? 일단 회담테이블에 앉는 게 더 중요하다

새 날 2013. 6. 12. 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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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 당국회담의 성공을 기원하는 포스팅을 남긴지 채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아 결렬되었다는 소식이 속보로 전해져 온다.  이는 애달프게 회담을 기다려온 수 많은 이들을 황망하게 만드는 결과다.  물론 상황 추이를 좀 더 지켜보긴 해야 할 듯하지만, 이번 회담이 성사되기까지 무척이나 지난하고 힘든 여정을 지나온 터라 일단 너무 안타깝다.

 

속보로 전해진 남북 당국회담 결렬 소식

 

그런데 알려진 회담 결렬 사유는 우리를 더욱 슬프게 한다.  표면적으로는 회담에 참석할 우리측 수석대표의 격이 맞지 않아 북측에서 일방적으로 회담 보류를 통보해 온 것으로 전해진다.  마치 북측이 격을 핑계로 회담 자체를 무산시킨 듯한 뉘앙스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이유를 따져들게 되면 이번 회담의 결렬, 결국 우리측 책임이 더 커 보인다.

 

정부는 문제를 협의 및 해결할 수 있는, 책임있는 당국자가 수석대표가 돼야 한다며 김양건 통일전선부장을 수석대표로 보내줄 것을 북측에 줄곧 요구해온 바 있다.  아울러 당초 우리 정부의 경우 남북 장관급 회담을 제기해 왔던 터라 우리측 수석대표로서 류길재 통일부장관을 내세울 예정이었고 당연히 그리 될 줄 알았다. 

 

그러나 11일 남북이 동시에 교환한 회담 참석자 명단엔 예상과는 달리 김남식 통일부차관이 우리측 수석대표로 올려져 있었다.  북측과 치열한 신경전과 기싸움을 벌이다 결국 막판에 꼼수를 부린 셈이다.  빈정 상했을 북측에선 회담 결렬이란 악수를 꺼내들었다.



격(格)이 그리도 중요할까?

 

우리 정부에서 제기해 오던 "격"의 문제가 오히려 부메랑이 되어 되돌아온 셈이다.  그렇다면 과연 그 격이란 게 무엇인 걸까.  이전 정부에선 5년 내내 "국격"이란 단어를 입에 달고 살더니 이번 정부에선 또 웬 "격" 타령을 하는 걸까 싶어 국어사전에서 그 의미를 찾아 보았다. 

 

격(格) - 주위 환경이나 형편에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분수나 품위

 

회담이나 협상 테이블에 상대방과 마주앉게 되노라면 최대한 우리측에 유리한 결과를 이끌어내야 하는 것이 당면한 과제다.  때문에 기선제압이나 치열한 수싸움이 오고 가는 현상,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 정부, 너무 성급했다.  회담 테이블에 앉기도 전에 지나치게 상대방을 의식한 탓이다.  물론 상대방이 쉽지 않은 상대라는 건 잘 안다.

 

하지만 위중한 사유가 아니라면 일단 회담 테이블에 먼저 앉았어야 함이 옳다.  이번 회담이 얼마나 어렵게 마련된 자리인데, 필요한 논의는 회담 테이블에 앉아 하면 될 것을, 결국 협상 테이블에 앉기도 전에 기싸움을 벌이다 스스로 화를 자초한 셈이 돼버렸다.  더군다나 끝까지 격 운운하더니 막판엔 꼼수까지 부렸다. 

 

格과 형식보다 회담 테이블에 앉는 게 더 중요

 

상대방에게 격을 논하기에 앞서 오히려 우리가 먼저 그에 어울리는 격을 갖춰야 했던 것은 아닐까?  이번에 개최 예정이었던 회담 장소는 서울의 한 호텔이다.  우린 그들을 손님으로 맞이하려던 참이다.  이 중차대한 회담이 유치하게 무슨 아이들 자존심 대결의 장이라도 된단 말인가.  눈치작전 펼치 듯 쓸 데 없는 자존심 대결을 벌이다 결국 일을 그르치고 만 셈이 돼버렸으니 말이다. 

 

ⓒ 동아일보

 

정부는 자존심과 형식 때문에 당장 우리 발등에 떨어진 급한 불을 끄려 하지 않고 있다.  북측을 대화 파트너로서 존중하는 것이 아닌 일방적인 굴종을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이쯤되면 애초 북측과의 대화 의지에 진정성이 있었던 것인지에조차 의구심이 들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다.  때문에 이번 회담 결렬 결과 또한 박근혜 대통령 취임 초기부터 줄곧 그녀의 발목을 붙잡아왔던 아집과 불통이란 그림자의 연장선 상에 놓여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전해져 온다. 

 

박근혜정부가 입버릇처럼 달고 사는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라는 것이 우리만의 일방통행식 압박과 독주만으로 유지될 수 있는, 그런 성질의 것인지 되묻고 싶다.  때문에 작금의 엄중한 시기엔 쓸 데 없는 격이란 형식에 얽매인, 실체 없는 유령을 좇기 보다 융통성과 유연성 발휘가 그 무엇보다 못내 아쉬운 것이다.

 

결과적으로 남북 당국회담의 성사 여부는 불투명해졌다.  한반도 평화로 가는 길은 역시나 쉽지 않으며 거저 얻어지지 않는 듯하다.  격이나 형식을 지나치게 추앙한 결과다.  이제 또 북측의 태도 변화만을 넋 놓고 기다려야 할 상황이다.  만일 회담 기회가 다시 찾아오게 된다면, 제발이지 일단 회담 테이블에 먼저 앉자.  격은 그 후에 따져도 늦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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