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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쉽게 끝나지 않는다.. 영화 '69세'

새 날 2022. 1. 20. 2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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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책방 대표 동인(기주봉)과 동거 중인 효정(예수정)은 어느 날 병원에서 물리치료를 받던 도중 간호조무사 이중호(김준경)에게 성폭행을 당한다. 사건을 도무지 어떻게 처리해야 좋을지 몰라 고민하던 효정. 동인에게 사실 그대로를 털어놓은 뒤 그와 경찰서에 동행하여 가해자를 고소한다. 

 

구체적인 사건 조사가 이뤄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가해자는 피의자의 신분으로 전환된다. 하지만 이번 사건은 비슷한 여타의 다른 사건들의 처리 과정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로 흘러가는 듯하다. 구속 수사가 이뤄질 것이라는 사건 담당 경찰관의 설명과는 달리 법원이 피의자에 대한 구속영장을 기각한다. 사건의 개연성이 부족하다는 이유였다. 동인은 효정을 돕기 위해 동분서주해 보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높은 현실의 벽이 그의 앞을 가로막을 뿐이다.

 

 

영화 <69세>는 성폭행 사건을 계기로 스스로를 가둬둔 틀을 부수고 세상의 시선에 한없이 움츠러들던 자신을 꼿꼿이 세우는, 올해 69세가 된 한 여성의 이야기다. 세상의 편견과 폭력에 무릎 꿇지 않고 맞서는 여성의 서사를 통해 소외돼온 노년의 삶을 들여다본다.

 

효정의 나이, 올해로 69세다. 그녀에게 몹쓸 짓을 한 간호조무사의 나이는 29세다. 경찰관들이 해당 사건을 미온적으로 처리하고, 심지어 법원마저도 피의자의 구속영장 청구를 기각한 데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20대 청년과 곧 70을 바라보는 여성 사이에는 성폭행이라는 범죄가 형성될 여지가 없을 것이라는 시각이다. 고소장을 접수할 당시 담당 경찰관들이 왜 어이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고, 꽤 비중이 있는 형사 사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왜 수사에 소극적으로 임해온 것인지 짐작이 가는 대목이다.

 

 

수사를 진행하던 담당 경찰관은 급기야 효정의 기억력을 의심하고 나섰다. 기억의 오류 아니냐며 치매 검사를 직접 권장하기까지 한다. 69세의 나이라면 뇌의 기능에 문제가 있을 수 있음을, 그러니까 그녀가 고소한 사건의 골자가 강제에 의한 관계가 아니었음을 에둘러 표현한 것이다. 젊은 성폭력 피해자들이 호소해오던 2차 가해와는 결이 조금은 다르나, 이러한 행위는 피해자에게 또 다른 고통을 전가하는 셈이 된다. 효정은 이 끔찍한 현실 앞에서 과연 주저앉게 될 것인가, 아니면 세상에 과감히 맞서게 될 것인가.

 

 

효정과 비슷한 연령대를 향한 세상의 시선은 몹시 차갑다. 효정은 오랜 기간 수영으로 몸을 단련시키고 건강을 유지해온 덕분에 몸매도 그럭저럭 갖춘 편이다. 그러나 세상은 그런 그녀에게 '어머, 몸매가 너무 예쁘네요' 라고 짧게 말하지 않는다. '나이에 비해' 라는 조건이 붙거나 '처녀라고 해도 손색이 없겠어요' 따위의 문장이 뒤에 이어진다. 물론 이러한 관심이라도 드러내면 그나마 다행이다. 세상은 노인을 투명인간 취급하기 일쑤이다. 무관심으로 일관한다. 노인이 되면 경제활동인구 통계 산출에서 제외되어 경제적으로는 무쓸모해지고, 여성성과 남성성은 그 경계마저 희미해져 젊은 시절에 비해 상대적으로 초라한 외모를 지니게 된다. 그래서일까. 세상은 이들에게 상당히 가혹하다. 관심조차 없다. 

 

 

극중 효정은 옷 맵시가 매우 뛰어난 인물로 묘사된다. 그런 그녀를 칭찬해주는 주변 사람들. 그러나 그녀가 그토록 옷에 집착하는 이유를 알고 나면 가슴 한켠이 먹먹해진다. 이는 노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세상으로부터 소외 당하고, 무시 당하는 일상에서 벗어나기 위한, 그녀 스스로가 마련한 처방전이었다. 조금이라도 옷을 잘 입고 다녀야 무시 당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직접 체득해온 그녀 나름의 생존법이었다. 

 

 

영화 <69세>는 무관심과 소외에 익숙해진 69세의 여성이 자신을 고통으로 몰아넣은 세상을 향해 일갈함으로써 뒷방 늙은이가 아닌 세상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도전하는 한 사람으로 우뚝 서고자 하는 이야기다. 배우 예수정의 차분한 내면 연기가 인상 깊게 다가오는 작품이다.

 

효정은 꿈이 많고 다재다능한 인물이다. 비슷한 연령대가 대부분 그러하듯이 현실에 치이고 나이가 들어가면서 그 꿈을 하나둘 내려놓게 된 것이다. 이 미완의 꿈을 다시금 희망할 수 있도록 군불을 지핀 건 공교롭게도 그녀를 끔찍한 현실로 몰아넣은 성폭행 사건이었다.

 

 

주름이 깊게 패이고 까칠해진 양 손을 피아노 건반 위에 올릴 때 두근거리던 효정의 가슴은 세상에 더 가깝게 다가서려는 의지의 표명이며, 가해자 이중호에게 거칠게 내뱉은 마지막 한 마디는 세상을 향한 포효였다. 누군가는 불쾌감을 호소할지라도 그녀가 "나는 성폭행 당했다"며 떳떳하게 말할 수 있었던 건, 현실이 쌓은 편견과 벽 앞에 주저앉지 않고 세상 밖으로 힘차게 걸어나가겠노라는 선언에 다름 아니다.

 

인생, 생각보다 길다. 그렇게 쉽게 끝나지 않는다.

 

 

 

감독  임선애 

 

* 이미지 출처 : (주)엣나인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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