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접 경험의 즐거움

빠름에 지친 당신을 위로해줄 영화 '비와 당신의 이야기'

새 날 2022. 1. 2. 20:12
반응형

대학 입시 학원에 다니는 영호(강하늘)는 벌써 세 번째 대입에 도전 중이다. 하지만 공부는 뜻대로 되지 않았다. 학원과 집을 오가는 일상은 무료하고 단조롭기 짝이 없었다. 매사가 심드렁했다. 그러던 어느 날, 영호는 초등학교 재학 시절 당시의 한 사건을 떠올리게 된다.

 

달리기 시합 도중 넘어진 자신에게 손수건을 건넨, 같은 학년의 한 소녀. 영호는 그녀의 체육복 위에 또렷이 새겨진 이름 석자 '공소연'을 기억했다.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당시의 사건은 그에겐 잊지 못 할 추억이 됐다. 수소문 끝에 그녀의 주소를 알아낸 영호는 무작정 편지를 써 보낸다. 영호가 보낸 편지는 며칠 후 부산에서 어머니(이항나)와 함께 중고책방을 운영하는 소희(천우희)의 손에 닿는다. 소희는 영호가 기억하는 소연의 동생이며, 소연은 오랜 지병으로 거동이 어려워 소희의 간호를 받고 있었다. 소희는 언니 대신 영호의 편지에 답장한다. 이렇듯 편지는 두 사람, 아니 세 사람을 잇는 매개체가 된다.

 

 

영화 <비와 당신의 이야기>는 초등학생 시절부터 간직해온 한 소녀를 향한 순수한 감정과 추억을 현실에서도 이어가길 바라는 한 남자에 관한 이야기다.

 

한편 영호를 좋다며 쫓아다니는 여성 하나가 있었다. 같은 입시 학원에 다니는 수진(강소라)이었다. 그녀는 장국영과 오로라를 유난히 좋아했다. 적극적인 성격이었던 수진은 영호의 웃는 표정이 우는 것 같아 좋다며 그에게 먼저 다가갔다. 하지만 영호는 그런 그녀에게 일정 거리 이상을 내주지 않는다.

 

 

 

소연으로 알고 있으나 사실은 소희였던 추억 속 그녀와 현실에서 편지를 매개로 이어진 영호에게 수진은 별빛과 같은 존재다. 화려함이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반면 소연은 영호에게 비로 다가온다. 비는 화려하지 않지만 삶에 위안을 준다. 평소 그가 워낙 비를 좋아하는 데다 비와 관련한 추억거리를 많이 간직한 덕분이다.

 

 

 

영화는 표면적으로는 추억과 편지로 이어진 로맨스인 듯싶지만, 실질적으로는 잊혀지고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아쉬움과 그리움을 토로하는 이야기다. 디지털 플랫폼 속에서 급속히 변화하고 빨라지는 세상. 편지는 이에 대비되는 일종의 아날로그와 같은 감성이자 존재감이다. 영호를 놓고 경쟁 아닌 경쟁을 벌이는 별빛과 비의 대비 역시 이의 연장선이다. 

 

영호의 아버지(이양희)는 같은 자리에서 30년째 가죽공방을 이어가고 있다. 소희가 운영하는 중고책방에서는 오래된 헌 책과 옛 감성이 담긴 LP판을 만날 수 있다. 이곳에서 서식 중인 책벌레(강영석)는 존재 자체가 그냥 아날로그다. 아날로그는 디지털이 지닌 세련됨과 편리함을 따라갈 수 없다. 그러나 헌 책 위에 켜켜이 쌓인 먼지와 질감, 그리고 특유의 냄새로 대변되는, 오감을 자극하는 감성만큼은 쉽게 버려질 만한 성질의 것이 아니다.

 

영호의 형인 영환(임주환)은 동생과는 달리 영특한 데다가 그만큼 계산에 빠르다. 좋은 대학을 나왔고 이른 나이에 돈도 제법 벌은 듯싶다. 아버지에게 가게를 하루라도 빨리 처분해야 한다고 종용 중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왠지 마뜩잖은 눈치이다. 영호와도 대립각을 세운다. 영호는 비록 공부 머리가 형에 비해 부족하고 계산도 늦지만,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찾아 아주 천천히 뚜벅뚜벅 걸어가는 중이다. 그는 얼마 후 우산 공방 '또닥또닥(소희가 보낸 편지 속 빗물이 떨어지는 표현)'을 오픈한다. 반면 형은 속된 표현으로 폭망한다. 이들 두 형제의 대립 구도 역시 디지털과 아날로그를 빼닮았다.

 

 

무엇보다 영상미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영화는 옛 추억과 감정을 지금은 잘 활용하지 않는 편지라는 매체를 통해 잇고 되살린다. 아스라히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그리움과 아쉬움을 감성적인 영상과 이야기에 담아 짧지 않은 여운을 남긴다. 엔딩 크레딧과 동시에 올라오는 쿠키 영상은 일종의 반전이다. 물론 이미 내용을 짐작한 분이라면 그다지 감흥은 덜하겠지만 말이다.

 

 

 

현실에서의 비는 그저 귀찮은 존재다. 그렇다면 감성적으로 바라보는 비는 어떨까? 극중 영호와 소희가 그랬던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고 즐겨하는 대상 아닐까? <비와 당신의 이야기>는 바로 후자 쪽 비와 관련한 이야기다. 삶에 지친 현대인들에게 비처럼 조금씩 스며들어와 종국에는 별빛처럼 반짝이게 해줄 작품이다. 빨리빨리를 외치며 정신 없이 돌아가는 세상에 지친 당신을 '또닥또닥' 위로해줄 것이다.

 

 

감독  조진모   

 

* 이미지 출처 : 소니픽쳐스엔터테인먼트코리아(주) , (주)키다리이엔티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