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편린들

"펭하!"로 요약되는 2019년 사회 변화에 대한 열망

새 날 2019. 12. 27. 1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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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 사회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사회 구성원들의 열망은 일과 삶이 적절한 균형을 이루고 이를 통해 일상에서 행복을 누리고자 하는 소박한 형태로 투영돼 왔다. 이러한 삶의 변화 의지는 ‘워라밸’과 ‘소확행’이라는 신조어에 고스란히 담겼다. 이는 그동안 지나치게 앞만 바라보고 달려온 성공 지향의 삶에 대한 성찰에서 비롯된 결과물이기도 하거니와, 아무리 노력해도 도저히 넘볼 수 없는 이상이라는 높은 벽 앞에서 어쩔 수 없이 현실을 수긍해야 하는 자조적인 의미를 내포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저물어가는 2019년 올 한 해 동안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고자 했던 열망은 무엇이었으며, 어떤 형태로 반영되었을까? 한 가지를 콕 집어 얘기하자면, 2019년 한 해를 뜨겁게 달군 EBS 캐릭터 ‘펭수’와 그의 인기에 따르는 사회적 열풍으로 요약된다. 


펭수의 인기가 어느 정도인지는 최근 한 취업포털사이트의 설문조사 결과로 가늠해볼 수 있다. 인크루트가 성인 남녀 2000여 명을 대상으로 조사하여 발표한 ‘2019 올해의 인물’에 따르면, 펭수 캐릭터가 BTS를 제치고 방송 연예 분야 1위로 선정됐다. 



대중들, 특히 2030세대가 이렇듯 펭수에 열광하는 이유는 무얼까? 할 말은 반드시 하면서도 상대에 대해 따뜻하게 배려해줄 줄 아는 펭수의 거침없지만 사려 깊은 입담이 우리 사회의 오랜 관행이기도 한 권위주의로 상징되는 수직적 질서를 흔들어놓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대중들은 이로부터 카타르시스와 대리만족을 느끼며 공감으로 화답하는 게 아닐까? 


시도 때도 없이 “김명중”하며 EBS 사장의 이름을 부르고, 외교부를 방문해서는 "여기 대빵이 누굽니까?"라고 거침없이 묻는 펭수다. 팬을 위한 이벤트의 돈은 누가 부담하느냐는 질문에 일고의 망설임도 없이 "김명중"하고 튀어나오는 펭수의 당당한 입담. 여기에 "사장님이 친구 같아야 회사도 잘 된다"는 소신 발언도 빠트리지 않는다. 


꼰대 같은 선배의 잔소리에는 그에 걸맞은 방식으로 적절히 대응하는 펭수. 입사 25년차 선배인 '뚝딱이'가 "나 때는 말이야"라며 잔소리를 늘어놓으려 하자 아예 귀를 틀어막으며 “그만하라”고 외친다. "나이가 중요한 게 아니라 상대를 서로 이해하고 배려하며 존중하면 되는 것“이라고 언급하며 기성세대의 횡포에 따끔한 일침을 가한다. 


더불어 직장인들이 크게 공감할 만한 말을 자주 꺼내드는 것도 인기 포인트 가운데 하나다. "잘 쉬는 게 혁신"이라고 말하거나 "왜 일은 한꺼번에 오는 걸까", “회사에서 신이 날 리 없다”며 대중들 앞에서 고충을 토로하는 펭수. 직장인들은 이렇듯 자신의 입장을 대변해주는 듯한 펭수의 발언에 기꺼이 공감한다. 


ⓒ자이언트 펭 TV


한편 펭수의 인기 배경과 맥이 닿아있는 “라떼는 말이야”라는 유행어 역시 2019년 올 한 해의 트렌드를 앞에서 이끌어온 주인공이다. 이는 말할 때마다 ‘나 때는 어땠는데..’라는 표현을 일삼는 ‘꼰대’를 풍자하는 표현이다. 여기서 꼰대란 ‘자신이 무조건 옳다고 믿는 나이 많은 사람’을 일컫는다. 이 꼰대라는 단어가 인기를 누리자 영국의 공영방송 BBC가 지난 9월 23일 ‘오늘의 단어’로 '꼰대(Kkondae)'를 선정하기도 했다. 


이렇듯 사회 일각에서 일고 있는 꼰대 풍자 현상이 인기몰이를 하자 이를 자신들이 만든 제품의 마케팅에 반영하는 업체도 하나둘 늘어나는 추세다. 편의점 CU의 '라떼는 말이야' 과자와 카카오톡의 '꼰대티콘-꼰대 김부장' 이모티콘 출시가 대표적인 사례다. 꼰대 풍자는 과열 현상을 낳으며 꼰대인지 아닌지의 판별 검사부터 자기검열까지 갖가지 사회 현상으로 이어지고 있다. 꼰대 풍자 광풍이라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말이다.


최근의 펭수 열풍이나 꼰대 풍자 현상은 결코 가볍게 볼 사안이 아니다. 이의 기저에는 공히 우리 사회의 오랜 악습과 관행이 관통하고 있으며, 이를 변혁하고 변화시키고자 하는 사회 구성원들의 강한 열망이 내포돼 있기 때문이다. 



세대 간 갈등을 부추기고 소통을 막아 관계를 단절시키며 툭하면 갑질을 일삼는 꼰대 행태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젊은 세대들이 근래 부쩍 늘고 있다. 이들은 기성세대와 달리 의사 표현에 훨씬 능동적이며 자유롭다. 부조리를 애써 참고 침묵하기보다 적극적으로 나서서 이의를 제기하고 이를 현실에 반영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펭수 열풍과 꼰대 풍자 현상은 이러한 세태가 현실에 투영된 사례다. 


이러한 움직임들이 아무쪼록 우리 사회 곳곳에 만연해 있는, 좀처럼 꿈틀거림이 없는 권위주의와 서열주의, 그리고 특권의식 등에 비록 미세할지라도 균열을 일으켰으면 하는 바람이다. 다가오는 새해에는 권위주의에서 비롯된 수직적 위계질서와 각종 갑질적 행태의 부조리한 관행들이 하나둘 타파되고, 사회 구성원 모두가 나이와 지위 그리고 계층에 관계없이 서로 이해하며 존중받고 배려하는 분위기가 사회 전반에 무르익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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